해운대구는 해운대를 이야기가 흐르는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와 함께 지역 내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국제신문에 게재된 글로, 7회에 걸쳐 해운대 불멸의 신화를 연재한다.
<1> 천제단과 마고당
신라가 멸망시킨 거칠산국의 다른 이름이 장산국 2300년 전 씨족 공동체가 산위 분지에 건국하고 수렵과 농사 풍년 기원하기 위해 천제단 쌓은 듯 옛 모계중심사회 상징인 마고할미 모신 마고당 1714년 이래 기우제 지내면서 건립한 기록 존재 신시가지 조성에 이전했지만 기운은 그대로 남아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 지리산 노고단, 태백산 천황단.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천단(祭天壇)이다. 가뭄과 홍수가 두렵고 천둥과 번개가 두렵고 일식과 월식이 두렵던 시절 제천단은 성소였다. 곡진한 마음으로 신과 교감하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제천단 역사는 아득하다. 두려운 게 많던 그 시절이 아득해서이다. 단군왕검 51년(기원전 2283년) 혈구(강화도)에 삼랑성(정족산성)을 짓고 제천단을 마리산에 쌓게 했다, 참성단이 그것이다.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 기록이다. 마리산과 참성단은 마니산과 첨성단 본 이름. 이로써 제천단은 아득한 세월 저 너머 단군왕검 풍속이랄지 유적임을 알게 된다. 노고단과 천황단 역시 두려움이 짓누르던 시절 쌓았을 것이다. 국내 제천단은 몇 군데일까. 단군 이래 민속이니 흔하지 싶어도 의외로 귀하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 신분이 지배자와 동급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된다. 아무나 제사를 관장할 수 없었기에 아무 곳에나 제천단을 쌓지 못했다. 그러기에 제천단은 몇 되지 않는다. 앞에 언급했듯 손꼽을 정도다. 그럼 부산에는 있을까. 있다면 몇 군데 있을까. 부산에는 거기 말고 없을 것 같은데…. 부산 산악인 김광식(64) 선생은 국내에서 안 가 본 산이 없을 정도로 빠꿈이다. 부산 산은 손바닥 안이다. 단자가 들어가는 유적지를 가진 산이 부산에 있느냐고 묻자 해운대 장산이 유일하지 싶다는 대답이다. 부산에 있기는 있는데 장산 천제단 하나뿐일 거라는 전언이다. 김 선생 전언이 옳다면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겠다. 금정산 같은 진산에도 있었지만 허물어지고 장산만 남았다는 게 그 하나고 애초 부산에는 장산에만 있었다는 게 다른 하나다. 제천단 자체가 귀했으므로 두 번째 가정이 설득력 높다. 어느 경우든 장산 천제단은 귀하다. 하나 남아서 귀하고 애초 하나라서 귀하다. 장산 천제단 역사는 얼마나 될까. 단언할 순 없다. 이왕 주는 점수라면 후하게 줘 보자. 노고단 천황단과 엇비슷하다고 하면 어떨까. 장산 천제단 역사를 다른 제천단과 연결하는 게 무리일 수 있겠지만 무리라고 단정하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닐는지. 가까이 있어 가볍게 보는 것들. 사람이든 사물이든 장소든 가까이 있어 소홀히 대한 게 어디 한둘일까. 집 나선 지 삼십 분 남짓. 집 가까이 있어 소홀히 대한 천제단을 찾아가는 길이다. 하천 물소리가 살갑다. 하천은 장산에서 발원한 춘천(春川). 강원도 춘천과 한자마저 똑같아서 이름을 처음 들으면 헷갈리기 일쑤다. 춘천을 거쳐 장산을 다녀왔다면 모르는 사람은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이 동그래진다. 등짝에 땀이 밴다.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힌다. 뒤에 주공4단지가 보인다. 앉은 자리에서 장산이 보인다. 완만한 능선이 푸근하다. 저 능선은 아마도 산이 불쑥 생길 무렵 그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 천 년 전 이천 년 전 그대로의 자연을 보는 건 얼마나 귀한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음과 끝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은 언제 봐도 귀하다. 천 년 전 이천 년 전 그 때 그 시절을 상상한다. 거칠산군(居漆山郡). 그 때 그 시절 여기를 그렇게들 부른 적이 있었다. 신라 때였다. 연산동과 배산, 복천동 고분 몇몇 임자들이 그 시대를 증언해 줄지 모르겠다. 거칠산군, 그 이름에 치떨며 분기탱천 높다란 무덤을 쪼개고 나올지도 모르겠다. 거칠산군은 애초 거칠산국이었다. 마을이 아니라 나라였다. 거칠다의 이두식 표현 거칠은 황령산 옛 이름 거칠뫼에서 따왔다고 한다. 삼한시대 부족국가 거칠산국은 신라에 복속되어 나라에서 군 단위 마을로 격하된다. 1900여 년 전 신라 4대 탈해왕 무렵이다. 신라 국경에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있어 신라왕의 걱정거리였다. 말 타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접근한 뒤 거칠산국을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거칠산국은 장산국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는 설명이 덧붙는다. 해운대-불멸의 사랑. 2013년 9월 초연된 창작오페라 제목이다. 전국 지자체 중 해운대구가 처음으로 기획하고 제작한 오페라여서 화제였고 3차례 공연 전석 매진이라서 화제였다. 신라에 맞서던 여왕 고아진이 모든 걸 포기하고 자결하려는 순간 측근 최윤후 장군은 사랑을 고백한다. 애틋한 사랑은 오페라를 끌어가는 한 축이다. 여왕 고아진이 신라에 맞서서 지키려고 했던 나라는 장산국. 나라에서 마을로 격하했던 바로 그 부족국가다. 동래부 동쪽 15리에 있다. 산 위에는 평지가 있고 가운데는 낮아서 습한데 사면이 토성과 같은 형상이며 주위 둘레는 이천 보 가량 된다. 전하기로는 장산국 터라고 한다. 1740년 간행 동래부지 기록이다. 기록으로 미뤄 장산 억새밭 너른 평지에 장산국이 존재했음을 짐작한다. 개인적으로도 수긍이 가는 기록이다. 2013년 6월 해운대구청 스토리텔링 자문위원들과 춘천 발원지 답사 도중 발목이 푹푹 빠졌던 억새밭 습지는 동래부지 기록과 다르지 않다. 동래부라는 공공기관에서 작성한 옛 기록이니 장산국은 역사에 실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전설이나 구름 잡는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장산국 존재감이 밤하늘별처럼 명징하다. 장산국을 인정한다면 제천단이 장산에 있는 근거도 납득된다. 국가 지배자와 동일인 내지는 맞먹는 신분의 제사장이 제천의식을 관장했겠기 때문이다. 장산이 품은 좌동은 구석기 유적지. 중동 청사포와 함께 부산의 역사를 신석기에서 구석기로 끌어올린 선사시대 현장이다. 해운대 신시가지를 일구면서 세상에 드러난 좌동 고분군은 구석기 이후 기원전 6세기 후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그러니까 장산 일대는 오랜 옛날부터 누대에 걸친 주거지였다. 두려운 게 많던 그 옛날. 두려움이 엄습할 때면 장산 사람들은 움츠러들었고 참다가 참다가 신을 찾았을 것이다. 신과 교감하는 제단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 제단이 곧 천제단이라면 천제단 역사는 다른 제천단처럼 아득해진다. 부산의 성소가 된다. 천제단에선 지금도 음력 1월과 6월 깊은 밤 제사를 지낸다. 신과 대자연을 대하는 곡진한 마음이 장산 자락에 터 잡고 사는 해운대 사람에겐 누대에 걸쳐 일상이 된 까닭이다. 슬슬 한기가 든다. 주공4단지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걷는다. 여기서 천제단까지는 사오십 분 정도. 춘천을 지나 호수를 지나 양운폭포를 지나 체육공원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체육공원에서 억새밭 쪽으로 5분쯤 걷자 오른쪽에 돌밭이 펼쳐진다. 바닷가 몽돌밭 같다. 돌은 하나같이 듬직하다. 안내판은 돌밭을 너덜겅이라 한단다. 장산은 너덜겅이 지천이다. 너덜겅 천지다. 왜 그럴까. 산책길 안내판은 여기가 화산이라서 그렇단다. 육칠천만 년 전 화산이 폭발했고 화산재가 20km 상공까지 치솟았단다. 화산재 크고 작은 알갱이가 굳어져 저 너덜겅을 이뤘을 터. 장산에서 마주치는 돌 하나하나가 육칠천만 년 전 별과 지구 사이 빛의 거리에서 온 것이라 여기면 여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귀기까지 느껴진다.
해와 땅 중간쯤/ 돋보기를 들이대면/ 빛이 모여서/가장 뜨거워지는 곳/당장이라도 불붙어/ 불기운이 하늘에 닿을 것 같은 곳/ 그 옛날도 그랬네/ 하늘까지 닿은 불기운 분수처럼 퍼져서는/ 사방천지 김 나는 돌을 뿌렸네/ 시름 깊어진 사람들/ 가장 뜨거운 곳 찾아 돌기둥을 쌓았네/돌 위에 돌을 얹고서/불기운 꾹꾹 눌렀네/지금도 해가 뜨거우면/함께 뜨거워지는 그 때 그 돌들/그 옛날도 그랬네/불기운 식히려고/저 앞에 흥건히 고인/ 해운대 바닷물 (동길산 시 장산 천제단)
너덜겅에서 일이 분 더 가자 또 너덜겅이다. 이번엔 왼쪽이다. 표지판은 이 언저리 천제단이 있음을 알려 준다. 천제단은 2300년 전 장산국이 씨족끼리 형성된 마을공동체로서의 일체감과 수렵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자연숭배사상에서 천신과 지신, 산신에게 제천의식을 올리던 곳이다. 아득한 시절 장산에 국가가 있었고 국가의 안녕을 비는 제천의식이 열린 곳이 천제단이었다! 안내판에서 몇 발짝 떨어져 이정표가 보인다. 천제단 1200m, 마고당 1000m. 1km 넘는 오르막 산길이래도 지레 겁먹진 말자. 육칠 분 걸으면 터억 가로막는 웅장한 돌탑 같은 돌담장이 마고당이고 거기서 샛길로 조금 더 가면 천제단이다. 마고당(麻姑堂)은 마고할미를 모신 곳. 오석 안내문은 1714년 이래 기우제를 지내면서 제당을 세웠다고 기록한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24호 동래부 동하면(東下面) 고문서 기록이라고 밝힌다. 그럼 마고는 뭐고 동하면은 뭘까. 우선 마고. 마고소양(麻姑搔痒)이란 말이 있다. 마고는 선녀. 손톱이 새 발톱처럼 길고 뾰족해 가려운 곳을 긁기 좋았다. 마고소양은 매사 잘 풀린다는 뜻이다. 선녀 마고는 할미이기도 하다. 늙은 여자 할미가 아니라 한+어미, 즉 대모(大母) 또는 성모(聖母)를 이른다. 부계중심 이전 모계중심 상징어 할미는 지모신(地母神). 단군과 맞먹는 한민족 창세신화 주역이다. 동하면은 동래가 읍이던 시절 행정지명. 재송동과 우동, 중동, 좌동이 동하면에 속했다. 동래읍을 중심에 두고 부산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었다. 동래 동쪽에 있으면 동면, 서쪽에 있으면 서면이었다. 그러므로 남면도 있었고 북면도 있었다. 아울러 당감동 쪽으로 동평면, 낙동강 모래사장 유역에 사면(沙面)을 두었다. 그러다 인구가 늘어나고 면이 커지면서, 현재는 1동과 2동으로 분동하듯, 상하로 분면했다. 동면은 동상면과 동하면, 서면은 서상면과 서하면 식이다. 지금도 거제도 섬에는 서상리, 서하리가 있다. 사면은 유일하게 상중하로 나누었다. 사상, 사중, 사하! 부산에서 가장 잘 나갔다는 증거다. 마고당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재도 제사를 지낸다. 천제단처럼 한 해 두 차례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6월에만 지낸다. 제당은 1924년 다시 지었으며 현판에 상산(上山) 마고당이라 쓰여 있다. 상산은 장산의 다른 이름이다. 1993년 해운대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현 위치로 옮겼다. 제당도 옛 제당이 아니고 자리도 원래 자리가 아니지만 내뿜는 기운은 옛 그대로고 원래 그대로다. 돌담장은 사진작품 감이다. 천제단은 마고당 지척이다. 몇 분 거리다. 제단 중간 널따란 바위에 입석 3기가 모셔져 있다. 삼신, 천신과 지신과 산신을 상징한다. 참고로 한단고기는 삼신을 천신, 지신, 사람의 신으로 지칭한다. 장산 천제단과 마고당. 언제 쌓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몇 백 년 전이니 몇 천 년 전이니 따지는 게 가소로울 수도 있겠다. 천제당과 마고당. 거기에 쓰인 돌 하나하나는 장산이 솟아나고 부산이 솟아나던 몇 천만 년 전 그 때 그 뜨거운 돌이다. 가뭄이 두렵고 천둥이 두렵고 일식이 두렵던 그 때 그 아득한 돌이다. ■ 동길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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