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많아 <반송>… 새로운 마을 <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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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8.06.08

해운대의 자연마을 - 반송동


소나무 숲 터널 이뤄
한 낮에도 촛불 켜고
지나야 했던 반송마을


주막 생기자 마을 형성돼
신리주막, 기장·철마주민
왕래거점이자 휴게소역할


* 반송마을
반송(盤松)마을은 반송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 하여 본동(本洞), 본리(本里)마을이라고도 하고 웃반송이라 한다. 1740년에 간행된 <동래부지> 방리조에는 지경리(地境里)라고 나오는데, 동면(東面) 관내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지경리가 오늘날 반송지역으로 기장현(機張縣)과 동래부(東萊府)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지경리라는 지명은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란 뜻이다. 1871년에 간행된 <동래부읍지> 방리조를 보면, 반송리로 기록되어 있고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반송이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밑동에서 굵은 가지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옆으로 퍼지는 잎이 짧은 소나무인데, 이 소나무가 많아 따온 지명이다. 지금의 운봉초등학교 일대는 아름드리 소나무(수령 200여 년) 숲이 터널을 이루어 한 낮에도 촛불을 켜고 지날 정도여서 반송굴이라 하였다. 지금은 소나무 몇 그루만이 반송마을 입구에 있어 그 옛날의 반송을 대표하고 있다.
반송마을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운봉마을 다음으로 생겼음은 알 수 있다. 당시 두 마을의 경계는 석대천을 따라 소리길(소로길)이 나 있었고, 그 길이 마을의 경계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민 씨들이 오래 전부터 살았다고 전해지며, 다음으로 순흥 안 씨들이 들어와 살았다. 이후 남원 양 씨가 집성촌을 이뤘다. 1904년에 간행된 <경상남도동래군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에 의하면, 동상면(東上面) 관내에 반송동이 있다. 당시 반송동의 호수는 24호다. 양 씨, 김 씨 등 성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 양 씨가 15호로 반 수 이상 차지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 울창했던 소나무들은 한국전쟁 이후 남벌되어 태반이 사라졌다. 1950년대 초기엔 부산지방 땔감 시장의 나무 공급을 거의 반송마을에서 도맡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반송동에는 1968년부터 1970년 사이에 부산 시내 철거 이주민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반송1동에는 수정동 고지대 철거민 2천924세대, 반송2동에는 철로변 철거민 2천700세대, 반송3동(현재는 반송1동으로 통합)에는 수정동과 조방 철거민 2천100세대가 이주해왔다. 1972년에는 구덕수원지 수해지구 이재민과 초량 영주지역 고지대 재개발사업 시행에 따른 이주민이 반송2·3동에 정착했다. 1993년부터 반송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의 산기슭과 연못까지 매립하여 주공·삼한·남흥 등의 아파트가 신축되면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옛날 전통마을은 아파트 공간에 파묻혔다.


* 신리마을
신리(新里)마을은 반송2동 5~7통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던 자연마을이다. 신리마을 앞으로는 석대동 옹기골에서 고촌역(기장군 철마면 고촌리)으로 가는 소리길(소로길)이 있었다. 이 소리길 중간 지점인 지경리에 주막이 생기고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신리(새마을)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반송유선방송 앞에서 석대교를 지나 반송마을로 가는 옛 길이 아직 남아 있다. 신리 주막은 기장·철마 사람들이 경유하는 휴게소 구실을 한 왕래의 거점이었다.
신리마을은 동부산대학 입구를 지나 반송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왼쪽의 수성탕(목욕탕) 일대로, 석대천을 경계로 한 지역에 있다. 석대천 앞에는 큰 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택단지로 변했다. 신리마을은 석대·운봉마을을 지나 반송마을로 가는 옛길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리마을 앞을 지나는 석대천은 수영강의 지류로서 기장군 철마면 안평 저수지 상류 산정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촌마을을 지나 신리마을 앞을 거쳐 반송1동과 석대마을 앞을 흘러내려 수영강 좌안으로 유입된다. 하천 길이는 7천775m이며, 유역면적은 22.55㎢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1년에 동래에서 기장으로 가는 신작로(新作路)가 개통되면서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이 신작로를 만들 때 석대의 불근디(반송 석표 왼쪽 옹기골), 새지골, 제공골 등의 돌을 깨어서 만들었다.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신리마을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마을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남원 양 씨가 20호를 이룬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기장으로 가는 도로변이 빌딩과 버스종점으로 번화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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