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나무> 반송동 삼절사 반송

null 게시물 상세 정보
작성자 홍보협력과 작성일 2023.05.01

"담담해서 고개 숙여 걸어야겠어요"

반송(盤松)은 분기탱천이다. 분노가 치솟아 밑둥치부터 갈래갈래 갈라진 소나무다. 갈라진 가지가 천에 이르고 만에 이르러 만지송(萬枝松)으로 불린다. 치솟는 분노를 천 가지, 만 가지로 나누어 다독이며 삭이며 평정심을 찾아가는 선비의 나무가 반송이다.
반송은 선비가 선망하는 나무. 나무가 내뿜는 기운이 서늘하고 나무가 내뿜는 그늘이 시원하다. 벗이 멀리서 오거나 멀리로 떠나면 반송 그늘에 들어서 시를 썼다. 무릇, 선비라면 반송을 곁에 두었다. 곁에 두고서 정자 이름에, 마을 이름에 반송을 붙였다. 그래서 조선팔도 방방곡곡에 반송이 있었다.
아무데나 반송일 수는 없었다. 아무데나 반송으로 불러주지도 않았다. 이름에 걸맞은 기운이 서려야 했다. 그 기운이 분기탱천이었다. 천 갈래 만 갈래 가라지는 반골의 기운이 서려야 비로소 반송을 붙일 수 있었고 누구라도 흔쾌히 반송이라 불러주었다. 아무나 선비가 될 수 없었듯이 아무데나 반송이 될 수 없었다.
해운대구 반송동. 부산에서 유일하게 반송을 지명으로 내세운 데다. 반송이 우거져서 지명이 되기도 했겠지만 반송 우거진 데가 어찌 여기뿐일까. 분명 다른 무엇, 반골의 기운이 서렸기에 반송은 반송이 될 수 있었고 누구나 수긍하고 불러주는 반송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삼절사 반송재(三絶祠 盤松齋). 반송의 지명 유래가 가늠되는 사당의 재실 명칭이다. 삼절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에 맞서다 순절한 남원 양씨 세 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경기도 삭녕군수 양지, 동래향교 훈도 양조한, 의병으로서 양조한의 아우인 양동한 세 분이다. 삼절사는 이들 세 공신을 추모하며 기리려고 1839년 세웠다. 사당 부속건물인 반송재는 위패를 모셨다.
반송재 이후 반송의 지명은 확 달라진다. 삼절사를 세우고 반송재를 들인 1839년 이전 반송의 지명은 지경리(地境里). 1740년 발간한 <동래부지>에 그렇게 나온다. 기장과 동래의 경계란 뜻이다. 반송이 지명으로 등장한 건 1871년. 1839년에서 30년쯤 지난 그해 발간한 <동래부읍지>에 비로소 반송리가 등장한다. 1904년 발간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는 반송동으로 표기한다.
"기와 담장도 담담하고 소나무도 담담하네요. 담담해서 오히려 고개가 수그러집니다. 여기선 고개 숙여서 걸어야 할 것 같아요."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삼절사 있는 곳은 반송동 으슥한 주택가. 해운대 장산 자락이다. 지금은 으슥하고 건물에 가렸지만 부산의 1호가 여기다. 부산의 성소며 부산의 국보다. 부산의 유림을 중심으로 매년 향사를 지내며 뜸하긴 하지만 참배객이 찾는다. 도시철도 4호선 윗반송역 4번 출구에서 10분 남짓 거리다.
삼절사는 당당하다. 대문만 해도 내삼문, 외삼문에 협문을 갖췄으며 삼절사 본채며 세한당, 반송재, 모현관 기와지붕은 육중하다. 그런데도 전체 느낌은 담담하다. 내세우지 않으려는 기색이다. 사당이니 그럴 만도 하다. 속은 꽉 찼으되 내세우지 않는 것 또한 선비의 자세. 참배객은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걸음걸이가 진중하다.
반송은 둘. 바깥쪽 외삼문 지나면 돌계단 입구에 하나 있고 안쪽 내삼문 담벼락에 하나 있다. 당당해도 내세우지 않는 삼절사가 품은 나무답게 반송 역시 내세우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반송은 반송. 분기탱천 나무답게, 부산 유일의 반송동을 대표하는 나무답게 솔잎 하나하나 꼿꼿하고 뾰족하다. 천 가지 만 가지 솔가지는 저 꼿꼿하고 뾰족한 걸 어찌 다 받아내나 싶다. dgs1116@hanmail.net
동길산 시인

<해운대의 나무> 반송동 삼절사 반송

<해운대의 나무> 반송동 삼절사 반송

첨부파일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4유형:출처표시, 상업적이용금지, 변경금지 <해운대의 나무> 반송동 삼절사 반송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