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불멸의 신화 <6> 또 하나의 안드로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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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5.08.04

국록을 먹는 사람으로 어찌 살기를 도모하는가


 


해운대구는 해운대를 이야기가 흐르는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와 함께 지역 내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국제신문에 게재된 글로, 6회에 걸쳐 해운대 불멸의 신화를 연재한다.


임란 순절 양씨 일문 삼공신의 넋 위로하고 뜻 기린 사당
돌을 쌓은 화단과 담이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위풍당당
반송서 집성촌 이뤄 13대째 생활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져


자신의 안온한 삶을 위해 직언을 삼가는 고장난 지퍼입들
서민 고통 수수방관하는 자가 난무하는 작금의 현실 앞에
충이라는 단어 자체는 이미 사어인지도 모르겠다


해운대의 안드로메다.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펼쳐진 소나무가 많았던 동네, 철거민들의 이주처. 내가 알고 있는 반송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더구나 삼절사라니. 안드로메다에 있는 절?
생활의 편리함 때문에 한 번 이사 가면 좀체 빠져 나오지 않는다는 해운대구의 한 동네, 반송이 안드로메다라는 별칭을 얻은 것은 그런 해운대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떨어진 별이라는 이야기일 텐데….
임란 때 순절한 남원 양씨 세 분의 신위를 모신 곳이라는 간단한 정보만을 입수하고 길을 나선다.
아파트와 3, 4층 높이의 각종 상가 건물, 주택 등을 지나 길게 이어진 돌담을 따라 조붓한 길 안쪽으로 들어서자 기와지붕을 인 대문이 나타난다. 양쪽에 작은 문을 어깨동무한 큰 대문 이마에 상절문(尙節門)이라는 이름표가 걸려 있다. 대문 안으로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데 담장 밖으로 고개 내민 키 큰 남정네처럼 객을 바라보는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남정네들에게 좋다는 약재로 이름 난 산수유나무다. 주택가 한가운데 팥소처럼 들어앉은 삼절사에서 보는 것이라 그런가…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중앙에 있는 다소 급경사의 계단이 시선을 압도한다. 세한당(歲寒堂)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위를 바라보는 눈길을 고고한 절개와 정신으로 묵직하게 누르는 듯한 느낌이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과 억눌린 마음을 마침 집안의 제사 준비를 위해 자리를 지키던 양연모 씨가 저는 양통한 할아버지의 후손입니다라며 밝고 반가운 목소리로 풀어준다.
내일의 행사 준비로 한창 단장 중인 반송재를 일별하고 삼절사를 살펴보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
삼절사(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는 임진왜란 때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순국하신 양지, 양조한, 양통한 이렇게 세 분 충신을 모신 사당입니다. 전에는 삼절사 사당 공간이 너무 협소했어요. 오르는 계단도 정면이 아니고 옆으로 되어 있었고요. 2년 전에 시의 예산도 받고 해서 뒤쪽에 확보해 놓은 땅으로 이건(移建)을 했어요.
세한당과 거의 맞붙어 있던 삼절사를 뒤쪽으로 이동해서 재건했다는 양연모 씨의 설명을 듣는데 시선은 성벽 같으나 아기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지는 담장으로 향한다.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조성한 화단과 나지막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삼절사의 모습이 소박하면서도 위풍당당하게 느껴진다.
참 잘 지어진 사당 같아요!
하하하 안 그래도 부산시 고건축문화위원이 사당치고는 아주 잘 만들었다고 합디다.
양연모 씨의 호탕한 웃음 속에 내심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온다.
저건 뭔가요?
삼절사 건물 뒤쪽 귀퉁이에 서 있는 작고 귀여운 굴뚝 모양을 가리키며 묻자 어디나 가보면 옳은 게 없어, 내가 직접 그림을 그려 주문 제작했어요. 축문 태우는 겁니다라는 양연모 씨의 대답이 겸연쩍은 웃음과 함께 돌아온다.
조자 한자 할아버지와 통자 한자 할아버지는 형제인데 저는 통자 한자 할아버지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작은집인 거지요. 제가 여기서 13대째 살고 있어요. 조자 한자 할아버지는 원래 노포동 대룡리에 사셨는데 자손들이 이쪽으로 옮겨왔지요. 그래서 여기에 집성촌을 이루다보니 1839년 이명적 동래부사가 이곳에 세 분을 모시게 됐어요. 원래 큰집 쪽에 모셔야 되는데 지역상 여의치 않아 이쪽으로 모시게 된 거지요. 삼절사 때문에 반송이 충절의 고장이라 불립니다.
담 아래 아기자기하게 조성된 화단을 따라 걸으며 들려주는 양연모 씨의 이야기를 엿들은 바람이 화답하듯 한 차례 휘몰아친다.
세 분 어른 이야기를 좀 더 들을 수 없나요?
지(誌)자 할아버지는 원래 문신인데 왜적이 쳐들어오자 삭녕(지금의 경기도 연천)군수로 부임하시게 되지요. 그곳에서 항전하다 결국 순절하셨어요. 조(潮)자 한(漢)자 할아버지는 학자입니다. 동래 향교의 학자인데, 문묘(文廟)의 위패(位牌)를 지키며 싸우다 왜적이 쏜 총탄에 맞아 순절하셨고 충렬사에도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통(通)자 한(漢)자 할아버지는 조카하고 아들 데리고 출타하고 돌아오니 난장판이 돼 버린 거예요. 그 길로 바로 두 아들을 데리고 의병에 들어간 거죠. 울산 경주 대구를 거쳐 창녕 화왕산서 왜적을 맞아 전투를 벌이셨지요. 동래지구에서 안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돌아가신 분만 모실 수 있는 충렬사에 못 모시고 있는데….
형님인 정랑공(양조한)과 함께 충렬사에 봉안되지 못한 호조좌랑(양통한)에 대한 아쉬움이 배인 듯 조상에 대한 이력을 설명하다 양연모 씨가 말끝을 흐린다.
책에 없는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나요?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
음… 책에도 다 나오기는 하는데 조자 한자 할아버지 손자가 왜군에게 잡혀가서 왜군대장 양아들이 됐어요. 그런데 중국 상인하고 모의해서 왜군대장을 죽이기 위해 사약을 만들어요. 그 약을 왜군 대장이 보는 앞에서 매일 먹어요.
네! 사약을 먹어요?
그 대신 바로 해독약을 먹는 거죠. 양아들이 매일 뭔가를 먹으니까 어느 날 대장이 뭘 그리 매일 먹느냐, 하고 물어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래이래 좋은 약이라서 먹는다, 드릴까요? 하게 되지요. 그렇게 좋으면 내게도 좀 줘야할 거 아니냐, 하면서 같이 먹게 됐고 그래서 대장이 빨리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야기를 마친 양연모 씨가 문을 잘 안 여는데 오늘은 특별히 여는 겁니다 라며 굳게 닫혀 있던 삼절사의 문을 연다.
중앙의 주벽(主壁·사당의 주장 위패) 충민공 양지의 위패를 중심으로 양쪽에 정랑공 양조한과 호조좌랑 양통한, 세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옻칠한 의자 위에 올린 신주를 보자 저절로 마음과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된다.
봄과 가을에 부산시 동래 향교 유림들이 와서 제사를 관장합니다. 동래 향교가 음력 2월 초정, 충렬사가 2월 중정, 삼절사가 2월 말정에, 이렇게 날짜를 달리해서 제사를 지냅니다.
정갈하게 정돈된 삼절사 내부의 제사용품 및 제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밖으로 나온 후에도 양연모 씨의 친절한 안내는 계속된다.
꼬마야, 너도 이쪽으로 올라와야 된다.
세한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중앙을 밟은 내게 사당의 계단은 항상 오른쪽으로 올라오고 오른쪽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일러주시는데 마침 휴일을 맞아 엄마 손 잡고 삼절사를 찾은 꼬마 관람객도 계단 중앙으로 올라오다 사당의 계단 사용법을 하달 받는다. 사당의 계단 중앙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한다. 엄마 손잡은 꼬마와 내가 얼른 계단을 옮긴다.
강당으로 쓰이는 세한당 마당에 놓여 있는 희한한 돌 하나가 눈길을 끈다. 마치 작은 고인돌 같다.
제사 지낼 때 쓰는 희생(제사 지낼 때 바치는 산 짐승)을 올려놓는 돌이라고 한다. 즉 감생례(監牲禮)를 지낼 때 쓰는 돌인 것이다.
산 짐승을 잡아야 되니 하늘과 신에 고하고 잡습니다. 옛날에는 제관들이 전부 나와 세 바퀴를 돌고 소 돼지를 잡았는데 지금은 생닭을 잡아 올려놓습니다.
삼절사와 세한당을 둘러보고 내려와 중요한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는 모현관(慕賢館)으로 향한다. 자료비치실답게 모현관 내부에는 남원 양씨 족보, 기록 사진, 그밖에 삼절사 관련 모든 자료가 비치되어 있다. 오래된 사진과 자료를 살펴보느라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모현관에서 시간이 흘러간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끝내 나라 위해 목숨을 던진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 싸워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비켜 주기는 어렵다 라고 말한 송상현 동래부사, 붉은 갑옷의 전설적인 의병 대장 곽재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명장들의 공으로만 어찌 이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지킬 수 있었겠는가.
죽을지언정 난(亂)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된 도리요, 더구나 국록을 먹는 사람으로 어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내 얼굴에 검은 사마귀가 있고 내가 쓴 휘양에 흰 테를 둘렀으니 이를 표시로 내 시체를 수습하라라고 말한 후 활을 쏘며 항전 하다 순절한 충민공 양지.
요망한 왜놈들에게 더럽힘을 당하게 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성현(聖賢)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송 부사의 지시에 따라 혈전하다 옥쇄한 호조정랑공 양조한.
두 아들 의(蟻)와 숙(肅)을 데리고 곽재우 장군을 도와 혁혁한 전과를 올린 호조좌랑 양통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린 이들의 이름이다.
국가의 안위 보다는 일개 자신의 안온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직언을 삼가는 고장 난 지퍼입들의 위정자와 무수한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방관하는 국록을 먹는 자들이 난무하는 작금의 현실 앞에서 충이라는 단어 자체는 이미 사어인지도 모르겠다.
회자되는 단어에서 사라진 충(忠)은 거창할 것 없이 진심을 다하는 것, 참마음이다. 우리가 삶을 지탱해 나가는 데 있어 이보다 더한 지표가 무엇인가. 우리 모두 총체적인 난국 속에서 질퍽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지표를 잃어버렸음이 아니겠는가.
진심을 다해 참마음으로 삶을 마감한 옛 선인의 행적과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지표나 이정표에 불을 하나 더 밝히는 일이요, 미래로 나가는 선로의 희미한 선에 선명한 줄을 덧입히는 일일 것이다.
삭막한 시멘트 건물들 속에 팥소처럼 들어앉은 삼절사를 뒤로 하고 귀가 하는 길, 사유의 계절 중에 맞은 백미의 하루라는 생각이 스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먼 대상인 안드로메다는 곧잘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뜻 또는 나와는 상관없는 외부세계라는 의미로 쓰인다.
실제로 망원경의 출현 전까지는 성운 또는 성간물질의 구름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망원경의 등장으로 안드로메다는 나선형의 은하임이 밝혀졌다. 멀지 않은 안드로메다에 아름다운 별이 있다.
 ■ 나여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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