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불멸의 신화 ③효자가 피워올린 봉홧불-간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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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5.05.06

누가 허락없이 봉홧불을 피웠느냐, 당장 그 놈을 잡아 들여라


붙잡히기를 기다려 끌려온 범인을 본 수사는 난감했다
제 어미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십사 불을 피웠습니다
포승줄에 묶인 어린 아이의 목소리와 눈빛은 간절했다


이래도 계속 잡아뗄 것이냐 모은 증거들이 쏟아지자
범행을 부인하던 능노군은 마침내 고개를 떨구었다


네가 어미에게 큰 효도를 하였구나 수사의 칭찬에
상복을 입은 아이의 입가에도 살포시 미소가 일었다


금세 숨이 목구멍에 차올랐다. 그렇다고 멈출 수 없는 길이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험한 곳도 오를 각오가 돼 있었다. 그렇게 오르길 얼마일까. 눈앞에 봉수대가 보였다. 명은 재빨리 몸을 낮추었다. 후망군도, 건물 앞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요의를 참지 못해 숲으로 들어간 봉군이 바지춤을 추스르며 스윽 나타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명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힘껏 봉수대를 향해 던졌다. 탁, 소리나 났다. 명은 얼른 몸을 낮추고 다시 한 번 동정을 살폈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명은 가슴에 품은 부싯돌과 솜뭉치를 꺼내 재빨리 연대를 향해 달렸다. 땔감이 마련된 아궁이 앞에 다가가자 서둘러 부싯돌을 댕겼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불씨가 쉬 살아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마에 땀이 비죽 솟았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그때 파파팍, 불씨가 솜뭉치를 휘감더니 이내 혀를 날름거렸다. 명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시각, 좌수영성의 수군통제사(수사)는 내아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동절기를 대비해 선박 수리며 땔감이며 식량 준비로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이었다.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성내를 순시하며 수군들을 채근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그때 만호가 달려와 간비오봉수대에서 수(연기)가 올랐다는 급한 전갈을 알렸다. 수사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어 다시 한 번 만호를 향해 되물었다. 뭐라고 그랬느냐? 예, 제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옵니다. 수사는 얼른 내아를 박차고 나와 뜰 앞에 섰다. 그리고 재빨리 간비오산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투명한 하늘 위로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수사는 그것을 보면서도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신사 행렬이 오가는 태평시절에 봉홧불이라니. 황령산봉수대에서도 연기가 올랐느냐? 황령산봉수대는 주선으로 다섯 기의 봉수대를 갖춘 곳이었다. 간비오봉수대는 황령산의 봉수에 따라 기장 남산으로 전달만 하는 일종의 보조간선이었던 것이다. 확인해본즉 황령산봉수대는 여전히 1봉수만 오르고 있었습니다. 만호가 고개를 꺾은 채 말했다. 수사는 그 말을 듣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황령산봉수대에서 평상시처럼 1봉수만 연기가 오르고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포도장을 보내 수를 올린 범인을 잡아들이라! 예, 알겠습니다.
수사 나으리! 수를 올린 범인을 잡아 동헌 뜰에 대령시켰사옵니다! 수군 하나가 내아로 달려와 아뢰었다. 그래? 범인을 벌써 잡았다고?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범인을 잡아들이다니 수사조차 믿을 수 없었다. 범인을 어디서 잡았더란 말이냐? 예, 그게. 얼른 말하지 못할까. 범인은 불을 지르고도 현장을 떠나지 않고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은 듯하였사옵니다. 뭐라고? 수사는 제 귀를 의심했다. 알았으니 잠시 먼저 동헌에 가 있거라. 수사는 수군을 돌려보낸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나라의 안위를 해하는 막중한 죄를 저지르고도 현장에 남아 고스란히 잡히기를 기다렸다? 그렇다면 필시 말 못할 사연이 있을 터. 수사는 잰걸음으로 동헌으로 향했다. 동헌 앞에 서자 수사는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승줄에 묶은 범인은 예상과 달리 어린 꼬마였던 것이다. 이런 철딱서니 없는 녀석이 범인이라니. 수사는 마루청에 놓인 의자에 앉자마자 호통부터 내질렀다. 네가 나라의 안위를 해친 짓을 한 것은 알고 있느냐? 땅바닥에 무릎을 꺾고 앉아있던 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녀석이 나라의 안위를 해치는 중죄인 것도 알고 있으렷다? 녀석이 다시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다면 왜 수를 올렸느냐? 그제야 명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제 어머님 때문에요. 뭣이? 고작 어미 때문이라고?


아이의 말을 들은 수사는 잠시 난감했다. 아이의 말대로라면 살해사건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건 그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어쩌면 그런 마음을 품게 만든 것이 그를 바라보는 아이의 애처로운 눈빛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직접 동래부사의 협조를 구하는 관문을 작성해 띄웠다. 그리고 지금 초조하게 위임서가 도착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듣자하니 내일이 발상이라니 지체했다가는 무덤에 묻힌 사람을 도로 파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때 성문 앞에서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일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파발꾼이었다. 그래, 어찌 되었느냐? 여기, 수결이 담긴 부사의 위임장이옵니다. 그래? 그러면 먼저 의관과 검관부터 아이의 집으로 보내라! 예,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한데 아이는 어떻게 하지요? 곁에 섰던 만호가 물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저기입니다. 명이 손가락으로 제 어미를 발견한 곳을 가리켰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마을과 동떨어진 인적이 드문 해안가였다. 게다가 그곳은 큰 암초로 둘러싸여 있어 은밀하기 짝이 없었다. 수사는 말에서 내려 천천히 바닷가로 향했다. 수사를 기다렸다는 듯이 세찬 파도소리가 너울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덩달아 바람까지 날뛰었다. 바위 사이에는 파도가 갈아 만든 고운 모래가 밭을 이루고 있었다. 수작을 벌이기에는 맞춤한 장소였다. 흐음, 수사가 기침으로 호흡을 가다듬더니 곁에 선 수군 하나에게 물었다. 시신을 발견한 시각이 언제였다고 했더냐? 어제 저녁이옵니다. 갯가에 조개 캐러 가선 돌아오지 않아 저 아이가 찾아 나섰다가 여기서 발견했다더군요. 수군이 대답했다. 수군의 말대로라면 운촌마을 일대에서 군선을 수리하기 위해 목재를 베어 나르던 날이었다. 아이를 이리 데리고 오라! 수사가 소리쳤다. 그러자 수군이 아이를 대동한 채 현장으로 달려왔다. 수사는 허리를 꺾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야, 마음 아프겠지만 하나만 묻자. 대답해 줄 수 있겠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엄마의 머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기억하겠느냐? 바다 쪽으로요. 그럼 머리에 피를 흘린 흔적이 있더냐? 머리뿐만 아니라 두건에도 핏자국이 있긴 했습니다. 그래? 수사는 아이의 말에 혹시 모를 실마리를 찾기 위해 바위틈이며 모래톱 속이며 샅샅이 뒤지라고 수군에게 명했다. 하지만 찾아낸 단서라고는 녹슨 편자 하나가 전부였다. 수사는 혼자 바위 표면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머리에 피가 났다면 필시 어디엔가 부딪쳤을 터. 그때, 수사의 눈을 파고든 것이 있었다. 뾰족 튀어나온 바위 모서리에 묻어 있는 터럭 한 올이었다. 수사는 터럭을 떼어내고 그 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그런 다음 혼자 휑하니 말을 타고 운촌마을로 향했다. 범행의 흔적을 찾던 수군들은 서로 바라보며 눈만 씀벅였다.


금줄이 쳐진 대문 밖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말을 탄 수사가 나타나자 창을 쥐고 있던 수군 하나가 소리쳤다. 다들 저리 비켜라, 수사 나으리 행차시다. 그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한쪽으로 몰려섰다. 수사는 대문에 다다르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곤 아이의 집을 일별했다. 남정네 하나 없이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형편이라 초라했지만 비교적 정갈한 편이었다. 말에서 내린 수사가 대청마루로 올라섰다. 검험을 하던 검관이 얼른 방문을 열었다. 초주 냄새가 훅 몰려왔다. 그래, 검시는 다 끝났느냐? 예, 목 주위에 종이를 바르고 초주를 발랐더니 보이지 않던 멍자국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손톱 밑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며 핏자국도 확인했습니다. 그래? 그 머리카락을 볼 순 없겠느냐? 여기 있습니다. 수사는 검관이 건네준 머리카락을 쥐고서 눈이 뚫어져라 살폈다. 그러더니 흐음, 하는 신음을 또 뱉어냈다. 수사는 이내 검시 중인 나신의 여인을 살폈다. 여인의 키는 그리 크지 않았고 머리숱은 짙고 곧았다. 비록 햇볕에 검게 그을렸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해 어디서도 눈에 띌 만한 미인이었다. 혹시 머리 뒤쪽도 살펴봤느냐? 예, 아무런 상처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이만하면 됐다. 검관은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홉떴다.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으니 고인에게 예를 다하고 서둘러 장례 절차를 밟도록 하라!


수사의 명령을 받은 만호와 갑사는 재빠르게 수군들을 소집했다. 여기엔 잡색군과 능노군, 배지기도 예외일 수 없었다. 수사 나으리, 다들 모였습니다. 수사는 작정한 듯이 미간을 좁히며 나섰다. 내가 자네들을 모이게 한 것은 불미스런 일 때문이다. 우리가 왜 여기 있는가. 적을 막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는 달리 말하면 적으로부터 백성의 안위를 살피는 일과 다름없을 터. 헌데 그런 막중한 임무를 잊고 되레 백성에게 억울함을 주다니! 모여 있던 수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수사는 수군거림이 잦아들자 다시 말을 이었다. 며칠 전부터 운촌 일대의 야산에서 목재를 캔 사람들은 앞으로 나서라! 명이 떨어지자 하나둘 앞으로 나섰다. 그대들 중에서 혹여 흑심을 품어 본의 아니게 여인을 겁탈하려 한 자가 있다면 자진해서 나서라. 그렇게 한다면 극형만은 피하도록 해주겠다! 수사의 말에도 스스로 범인이라고 나서는 자는 없었다. 수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럼, 지금부터 모두 웃옷을 벗고 상투까지 풀어라. 앞에 도열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감히 명령을 어기는 자는 없었다. 수사의 눈길이 웃통을 벗어 제친 한 사람에게 가서 멎었다. 유달리 몸에 멍과 생채기가 많았고 머리카락도 반 곱슬형인 능노군이었다. 수사가 능노군에게 다가가 넌지시 물었다. 자네는 몸에 무슨 상처가 그리 많은가? 예, 벌목하다가 그만. 그렇게 몸도 아끼지 않는 부지런한 자가 밤늦게 노닥거리다가 성으로 돌아왔다? 그, 그건 바닷가에 누웠다가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아녀자를 겁탈하려다가 늦은 것이 아니었다? 예? 겁탈이라뇨. 전 아낙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사옵니다요. 그럼, 네 머리에 난 상처는 어찌된 것이냐? 이, 이건 어두운 길을 오다가 바위에 부딪쳐서 그만. 바위에 부딪쳤다? 그렇다면 바위에 붙어 있던 이 곱슬한 머리카락이 네 놈 것이 분명하렸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거짓말하지 말거라. 바위짬에서 네놈이 아낙을 겁탈하려고 했고 이에 놀란 아낙이 너를 밀쳐 다친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아닙니다, 전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요. 어허, 그래도 이놈이! 아낙이 바다 쪽으로 도망가자 너는 달려가 아낙을 쓰러뜨린 후 목까지 옥죄지 않았느냐. 그래서 아낙은 저항했고. 나으리, 그건 억지입니다요! 뭐, 억지? 자네의 고부장한 머리카락이 죽은 여인의 손톱 밑에서도 나왔는데도? 그제야 능노군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목을 꺾고 울기 시작했다. 여봐라, 이놈을 당장 영창에 가두고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라!


명은 어린 상주답게 굴건제복하고 오동나무 지팡이를 쥔 채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명 옆에는 어린 동생 둘이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그래, 성복제는 지낸 모양이구나. 수사의 목소리가 나자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예를 갖추어야겠지? 수사는 영정을 향해 절을 올린 후 상주와 맞절을 했다. 어미에게 큰 효도를 했구나. 네 덕분에 원혼이 되어 떠돌 일도 없겠고. 이게 모두 나으리 덕분이지요. 아니라며 수사는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그런데 하나만 물어도 되겠느냐? 명이 고개를 들어 수사를 쳐다보았다. 봉수대에 올라가 불을 피울 생각은 어찌하게 되었느냐? 제 할아버지가 봉군이셨거든요. 그랬구나. 그렇담 어디서 근무하셨구? 여기 간비오봉수대에 근무하셨습니다. 그렇구나, 간비오가 큰 나무를 뜻한다더니, 그래 그런지 큰 인물이 태어났구먼. 수사가 명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명도 화답하듯 살포시 웃음을 피워 물었다.
 ■ 이상섭 소설가


해운대구는 해운대를 이야기가 흐르는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와 함께 지역 내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국제신문에 게재된 글로, 7회에 걸쳐 해운대 불멸의 신화를 연재한다.


해운대 불멸의 신화 ③효자가 피워올린 봉홧불-간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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