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아득한 옛날, 해운대에 사람이 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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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19.06.17

장산, 7천만 년 전엔 화산

화산암의 석영 결정
춘천 따라 흘러내려가
은빛 모래로 반짝이고

마그마로 데워진 해수
해운대 온천수 되었네

후기 구석기 유적
중동· 좌동서 발굴

해운대의 진산인 장산(쩾山)이 옛날 옛적에 화산이었고, 지금의 신도시 주변에 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다고? 발 등에 불이 떨어진 듯 하루하루를 허둥지둥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내 뿌리는 무엇인지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다. 과거가 없었다면 현재도 없을 텐데 말이다.
송정에서 반송동까지 해운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장산은 6,200만~7,400만 년 전 폭발했던 화산이었다. 화산재와 용암이 1,000m 두께로 쌓였고, 용암이 빠져나간 빈 공간이 함몰돼 화산암 복합체가 분포되었다고 한다.
화산의 흔적이라고 할까, 장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크고 작은 바위들이 모여 있는 너덜겅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화산암에 박혀있던 석영 결정은 춘천을 따라 흘러내려가 백사장의 은빛 모래로 반짝였고, 해저 마그마의 열로 데워진 해수는 장산의 찬 지하수와 혼합돼 해운대 온천수가 되었다.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 년.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인간은 약 70만 년 전 출현했다고 한다. 김지하 시인이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를 한민족의 발원지라고 신성시하듯이, 유라시아 지방에 살던 기마민족이 동쪽으로 옮겨와 고조선의 뿌리가 되었다는 학설이 흥미를 돋운다. 흉노, 선비, 돌궐, 몽골, 여진족 등 북방민족과 우리 민족이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옛날 옛적 좌동, 중동, 청사포 등 장산 언저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2만 년 전부터 1만 5천 년 전까지 후기 구석기 유적이 해운대에서 발굴되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해운대 신시가지 개발을 위한 부산박물관의 사전조사에서 해운대구 중동 59번지, 좌동 933번지, 산 82번지 일대에서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영남의 역사를 구석기시대까지 끌어올린 획기적인 일이었다. 처음 발견된 것은 1㎝ 길이의 박편석기. 바위나 큰 돌의 일부분을 떼어내 돌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망치돌, 찍개, 가는 칼 등도 출토되었다.
중동 유적은 지금의 주공 4단지 일대로 좌동 유적에서 300m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는 석핵, 고석, 뚜르개 등이 나왔다. 해운대구 중2동 청사포 유적은 다릿돌 전망대 방향의 동해남부선 폐선 철길 옆 구릉에 있으며 주변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원반형 석기와 석인장 박편 등이 나왔다.
1960년대 이전에는 일본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었다고 여겨졌으나 북한 지역을 포함 1,000여 곳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해운대에서 발굴된 유물은 두만강 유역인 함북 웅기군 굴포리의 석기와 유사하여 동해안을 따라 부산까지 문화 이전이 이루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나아가 일본 큐슈지방의 후기 구석기 유물과 비슷해 바다를 통해 문화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 발굴지인 대림2차·대동아파트 부근인 좌동초등학교 앞 햇살 공원에 세워진 해운대 구석기 유적지 기념비에는 "우리나라 구석기시대 연구 뿐 아니라 한·일 구석기문화의 비교 검토를 위한 자료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라고 새겨져 있다.
해운대 신시가지 지역은 구석기 당시 바다였으며 그 이후 동해안의 땅이 서서히 융기돼 육지로 변한 곳이다. 산과 바다, 온천과 강을 품은 사포지향(四抱之鄕) 해운대는 기후마저 비교적 온난했으니 한반도 구석기인들의 보금자리로 적합했을 것이다. 잔가지나 잡초로 지붕을 만들고 기둥 아래 돌을 고은 막집에서 생활했다. 20∼30명이 무리를 지어 식량을 채집하고 사냥이나 해산물 채취로 주린 배를 채웠으리라. 부산의 동삼동, 영선동, 암남동, 다대동, 강서 범방동 등지의 조개무지, 즉 패총이 신석기 시대 유적이라면, 해운대의 유적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구석기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험난한 자연환경, 사나운 동물과 맞싸워 자신과 가족, 무리의 생명을 지켜야 했을 것이다. 인간은 나약하면서 외로운 존재. 그러니 모든 탐욕을 내던진 채 연대하고 협동하며 공동체를 지켜야 했다. 날이 밝으면 음식을 구하고, 어두워지면 휴식을 취하며 고된 내일을 준비했으리. 전기나 휴대전화, 자동차는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을 터. 박수동 화백의 만화 고인돌에 나오듯이 단순하게 살아가면서도 본능에는 충실하지 않았을까. 동아대 교수를 지낸 신 진 시인은 석기시대라는 시집에 실린 시 마제석기-석기시대에서 사람들 모여 돌을 갈았네/ 돌을 갈고 곡식을 갈고/낮이면 해를 갈고 밤이면 어둠 갈았네/ 바람이며 별이며/ 돌을 갈아 빚었네…/ 밤도 꿈도 곡식도/ 이별도 그리움도 돌을 갈 듯 갈아 쓰던 때였네
돌을 벗하며 생계를 꾸려간 옛 사람들의 단순했던 삶이 참으로 부럽다.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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