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진성여왕과 최치원의 이루지 못한 꿈

null 게시물 상세 정보
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19.08.19

해운대구 기획 공연
구름 위를 걷는 자

진성여왕 못 다한 사랑
최치원 이루지 못한 꿈
뮤지컬로 생생하게 재현

신라시대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자(字)를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고 했다. 외로운 구름, 바다 위의 구름. 어찌 구름을 좋아했을까. 정처 없이 떠다니는 구름이 선생의 처지와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훗날 조선시대의 서산대사가 남긴 선시 한 구절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흩어짐이라(生也一 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처럼 구름은 덧없는 인생 자체가 아닌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인 선생은 "10년 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부친의 독려를 듣고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남이 백배 노력하면 나는 천배 노력한다"는 각오로 임했으니 18세 때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876년 당나라 선주의 율수현위가 되었다가 879년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도행영병마도통인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4년 동안 군막에서 표, 장, 서계, 격문 등을 제작했다. 특히 격황소서(擊黃巢書)에서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의논할 뿐 아니라 땅 속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의논하였다는 대목을 황소가 읽고 놀라 넘어졌다는 일화로 유명해졌다.
885년 귀국하여 당나라에서 지었던 저작들과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을 헌강왕에게 올렸다. 신라의 국운은 이미 기울어져 지방의 호족 세력이 커지면서 중앙의 재정은 궁핍해지고 농민들의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나 내란 상태에 빠졌다. 선생은 사찰을 지키다 전사한 승병들을 위한 해인사 공양탑 기문에서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 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기록했다. 진골 귀족 중심의 신분체제와 국정의 문란함 때문에 외직(外職)을 희망해 지방의 태수로 떠돌다가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건의했으나 6두품 출신으로는 최고 벼슬인 아찬에 올랐을 뿐, 개혁방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儒)·불(佛)·선(仙)에 모두 능통했던 선생은 자연과 함께 하는 은자(隱者)의 삶을 택했다. 벼슬을 내던지고 경주 남산, 해운대, 양산, 진해, 산청 등을 방랑하며 합천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898년 해운대 동백섬 동남쪽의 한 바위에 해운대(海雲臺)라는 석각을 남겨 오늘날 해운대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합천 가야산에 들어가면서 한 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청산맹약시도 남겼다. 선생은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해인사 대적광전 서쪽 언덕 학사대에 꽂아둔 지팡이는 전나무가 되어 천 년 넘게 선비의 기상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면 진성여왕은 누구인가. 경문왕의 딸로 오빠인 헌강왕과 정강왕이 갑자기 죽자 신라 51대 왕이 되었다. 선덕,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 세 번째 여왕이었다.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자 죄인들을 사면하고 조세를 면제시켜주며 불교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여왕은 숙부이자 애인이었던 대각간 위홍과 함께 살면서 음란한 여왕이라고 낙인 찍혔으나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위홍이 세상을 떠나자 젊은 미남자 2∼3명을 불러들여 가까이 지내고 그들에게 벼슬자리를 나누어줘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귀족들은 나태하며 사치스러웠고, 지방의 호족들은 강성해졌으며, 굶주린 농민들은 봉기에 가담했다. 최치원 선생이 시무책 10조를 건의한 것이나 피부병 때문에 진성여왕이 해운대 온천을 찾은 것도 이 즈음이었다.
진성여왕은 897년 신하들에게 "백성들이 굶주리고 도적이 일어나는데,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라며 헌강왕의 서자인 태자 요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그해 세상을 떠났다. 2005년 해인사 법보전의 비로자나불과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상의 높이와 너비 등 30여 항목을 실측한 결과 0.1∼1㎝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쌍둥이 불상으로 밝혀졌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붓글씨로 미루어 진성여왕과 대각간 위홍으로 추정되었다.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해인사를 그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원당으로 삼았다는 조선시대 기록이 남아있다.
진성여왕과 최치원 선생은 시무책 10조 때문에 만났다가 해운대와 해인사에서 다시 접점을 찾았다.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진성여왕은 해운대 온천축제 때 진성여왕 행렬로 모습을 드러내고, 최치원 선생은 동백섬 정상에서 시문과 함께 동상으로 환생했다. 해운대구청이 기획한 뮤지컬 해운대 연가-구름 위를 걷는 자는 배우만 23명이 출연해 진성여왕의 못 다한 사랑과 최치원 선생의 이루지 못한 꿈을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언론인

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진성여왕과 최치원의 이루지 못한 꿈

첨부파일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4유형:출처표시, 상업적이용금지, 변경금지 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진성여왕과 최치원의 이루지 못한 꿈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