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역사 속 인물-임진왜란 영웅 김희수, 어려운 이들의 벗 이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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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19.01.07

*우동 김희수
못안마을 뒷산 선황봉 못안골에는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 송상현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군자감 판관 김희수(金希壽)의 묘소와 1994년에 공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선황사(先篁寺, 우1동 산98-2)가 조성돼 있다.
김해 김 씨 경파 해운대 문중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10월 둘째 일요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에서 4월 15일 아침 왜적의 공격이 시작됐다. 왜적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함성을 내지르면서 성안으로 밀어닥쳤다. 성안은 백병전이 펼쳐져 왜적과 창, 칼, 몽둥이로 싸웠고,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왓장을 거두어 내리치기도 했다. 성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동래읍 군관민의 치열한 저항도 역부족이어서 판관 김희수와 향리, 관노 등은 격투 끝에 전사했고, 송상현 부사도 최후까지 저항하다 전사했다.
김희수는 가락후손 김녕군목자 경중조의 10세손으로 자는 운손(雲遜), 호는 지곡(池谷)이다. 임란 후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으로 기록하고 봉훈낭군자감판관을 증직했다.
1908년(순조 12) 4월에 선황곡 묘소에서 선무원종공신 증군자감판관 김해김씨공휘희수지묘 공적비가 후손들에 의해 건립됐는데 그 때 경향 각지에서 모인 참배객들이 남겨놓은 시문이 수록된 김공수비유감한시집이 있다.

*중동 이모준
섬밭마을에 이 공(李公)이 살았는데, 그는 매우 인심이 후해서 과객이나 걸인들을 진정으로 후대했다고 한다. 그가 돌아가시자 걸인들이 돈을 모아 이공의 공덕을 칭송하고 인격을 찬양한 유학이공모준송덕비를 1931년 11월에 세웠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걸인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후손들에게 동냥을 요구하니 견디다 못한 후손이 그 비석을 밭에다 묻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가세(家勢)가 기울고 또 후손에게 신병이 발병해 1970년에 다시 이 비석을 파내어서 세웠다.
이 비석은 달맞이길로 가다보면 예전 동해남부선 철길 건널목 앞의 미포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 옆에 서 있었다. 이 비석은 향토사학자 주영택 씨가 1989년에 발견해 빛을 보게 됐다. 지금은 장산 폭포사 입구 오른쪽으로 이전됐다.
이모준 송덕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기를 미루어서 타인의 어려움을 생각하는 공은 능히 선각하신 분이시오/ 힘써 부지런히 논을 갈고 개천과 도량의 물을 감사히 생각하여 재배 활용에 노력하셨고/ 행려들에 밥을 주어서 배고픔을 풀어 주시고 옷을 주어서 추위의 고생을 녹여주시고/ 자식을 두고 손자를 두고 여러 복록을 많이 거느리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인정 많은 해운대 사회에서 나눔 문화의 표본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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