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와 대중가요 - 609는 장미의 미소가 아니라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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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19.04.05

돈 벌어 오겠다던
열일곱 꽃다운 누이의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
그 시절 슬픈 자화상
노래 가사에 고스란히

미국의 포병 609 병기군단은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과 아프리카 튀니지 전역에서 609 고지 전투(Battle of Hill 609)를 치렀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동백섬 인근 운촌항에 LSM수송함정이 자리를 잡았고, 609부대는 지금의 송림공원과 해운대우체국 맞은편 지역에 주둔했다. 609부대에는 물자가 풍부하였기에 미군을 상대로 한 양공주 마을이 609라는 이름으로 형성됐다. 지금의 해운대 609는 해운대해수욕장과 불과 500m 거리에 불과하지만 거의 개발되지 않은 땅으로 남아있다. 최근 개발 붐이 일면서 윤락가의 운명에 귀추가 주목된다.
609는 로마숫자 DCIX인 합성수로 그 약수는 1, 3, 7, 21, 29, 87, 203, 609로 합은 960이다. 소인수분해는 그 약수 3×7×29로 구성돼 lim∑∫F(돈), F(여자), F(술), d(인생)=1001100001인 이진법으로 난 당신의 단 한 사람이 아니지오가 된다.
609가 판 것은 장미의 미소가 아니라 장미의 눈물이었다. 1960년까지 양공주들은 미군 부대가 있는 곳으로 옮겨갔고, 부산에는 충무동(완월동), 범천동으로 하야리아 부대 7개 사단에 흘러 들어갔다.
1970년대 열일곱 꽃다운 누이는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향한다. 공단 직공, 식모살이를 하지만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는 꾐에 술집과 매춘산업에 빠져든다. 이 시기에 나온 10인치 LP레코드 판 속에는 그 시대상이 담긴 대중가요가 있다.

거리에 핀 꽃(서라벌음반, 이재현 작사 작곡/윤일로 노래)
가엾다 인생살이 황금이 원수로다/웃음을 던지면서 거리에서 거리로/오늘은 이 집에서 내일은 저 집으로/밤마다 꿈길마다 황금에 짓밟히는/가련한 인생

거리에 핀 장미(서라벌음반, 이재현 작사 작곡/김정애 노래)
이 몸은 밤에 피는 거리의 장미/아무나 볼 수 있는 거리의 장미/마음에 있으시면 따라오셔요/멋쟁이 저 신사가 윙크를 하네/캄 온 마이하우스/오빠 잘 해줄게/나의 집으로

에레나가 된 순이(안다성 노래)는 부산역이나 버스터미널 근처에서 술집 접대부, 매춘부로 살면서 동생들의 학비며 집안 식구를 먹여 살리고자 애쓰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사기를 당하고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 고향을 그리워한다.
해운대를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한 이한식은 중학교 때 폭탄을 가지고 놀다가 왼쪽 다리를 잃었고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극동호텔 오락실 대표 한지식과 라이온스클럽의 도움으로 장애인을 위한 LP음반을 내기도 했다. 1963년에는 아시아레코드사 전속가수 겸 작곡가가 되어 가수 김상희 나훈아 김하정에게 곡을 주기도 했다. 이한식의 노래 밤 깊은 해운대는 한 때 노랫말이 방송윤리법에 저촉돼 삭제됐으나 가사를 수정해 음반이 나왔다.

밤 깊은 해운대
네온마저 잠이 들고 달빛만이 파도 위에/부서지는 백사장에 누굴 찾아 내가 왔나/지난 여름 육공구 여인이 그리워서 보고파서/또 다시 찾아왔다 밤 깊은 해운대 <끝>

/박명규, 한국해양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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