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일상 속의 웰다잉(Well-d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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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19.05.08

죽음에 대한 공포 극복
많은 대화만이 해법

요즘 웰다잉(Well-dying)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웰다잉을 글자 그대로 옮기면 잘 죽는다는 뜻이다. 아직 그 정의가 명확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품위 있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라고 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웰다잉이란 말이 낯설어도, 웰빙(Well-being)이란 말은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쾌적한 환경에서 즐겁게 사는 걸 웰빙이라고 한다. 웰빙의 죽음 버전이 웰다잉으로 저마다 꿈꾸는 이상적인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삶의 마지막을 준비해 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죽음을 편안하게 이야기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인류 역사상 죽음만큼 오래도록 고민해온 주제도 드물다. 종교나 문화라는 것도 결국은 인류가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이해해 온 하나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궁금하면서도 가장 금기시되는 대상인 죽음. 사람들은 어째서 죽음에 대해 이처럼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일까. 여기에 힌트가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이솝 우화 여우와 신포도. 어느 날 길을 가던 여우가 나무 위에 매달린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발견한다. 하지만 포도가 너무 높이 매달려있어서 도저히 닿을 방법이 없다. 머리를 굴리던 여우는 결국 포도를 따먹을 수 없는 현실을 깨닫는다. 마음속으로 저 포도는 분명 신포도가 분명해라며 발걸음을 돌린다.
우리는 때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대할 때, 여우가 높이 매달린 포도를 바라볼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대신, 그냥 눈을 감고 무시해버린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보다 이해하지 않아 버리는 것이 마음은 한결 가볍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존감에 상처를 덜 입는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마주할 때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싶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지만, 죽음의 실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죽은 후에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아니 그전에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죽은 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남아있기는 한 건지. 죽음에 관해 철저하게 아무것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여우의 길을 택한다. 더 이상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죽음 자체를 이야기하면 안 될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다.
반면, 죽음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른 방법을 권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죽음에 관한 더 많은 대화야 말로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예일대 셸리 케이건 교수는 "적절치 못한 감정으로 인생을 허비할 까닭이 없다"라고 강조한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기에 삶을 가능한 많은 것들로 채워 넣어서 최대한 많은 축복을 누려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금기 아닌 금기를 마주할 때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메시지다.
바야흐로 웰빙을 넘어 웰다잉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삶의 질 못지않게 죽음의 질에 대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로 성숙해 간다면, 웰다잉은 우리 일상 속에 저절로 자리를 잡아가지 않을까.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말마따나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인지도 모를 일이다.

신 승 건, 해운대구 건강증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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