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항일 촛불 시위 펼쳤던 장산 절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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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19.03.11

동래고보생들 절골에서
일본배척·동맹휴학 결의

퇴학 당한 박영출 군
독립운동 하다 붙잡혀
36세 나이로 옥사

절골 항일시위 전통
노다이 사건으로 이어져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이름 모를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이 되니 사방의 못에 물이 가득하구나. 중국 도연명 시인의 시 사시(四時)의 첫 머리다. 우수(雨水)이자 정월대보름이었던 며칠 전 봄을 재촉하는 비가 제법 내렸다. 장산 기슭에도 봄기운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계곡의 물소리 제법 요란하고 초목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동토(凍土)를 뚫고 새싹이 돋으며 나무마다 새순이 올라오리. 그리고 봄꽃 대궐에 대문이 활짝 열리겠지. 우리를 부를 터. 일제 암흑기에 총칼을 두려워 않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3.1절 100주년도 머지않았네.
청나라 강희제에서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가 황제로 있던 시절, 중국은 강성하였다. "중국엔 없는 게 없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성기가 지나자 관료들은 부패하였고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유랑 걸식하였다. 과학기술문명을 앞세운 서구의 열강들이 중국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 아편전쟁을 계기로 청나라는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막부를 퇴진시키고 구미(歐美)를 모방 학습하였다. 정부는 신사유람단을 미국과 유럽에 보냈다. 당시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중국과 조선은 곧 세계 열강들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일본은 그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가 여기서 비롯됐다.
그런데 일본은 서양의 선진문명뿐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근성마저 모방했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이기더니 을사늑약을 거쳐 한일병탄을 통해 조선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식민정책이라고는 경찰과 헌병에 의존한 강력한 무단(無斷)통치였다. 조선의 지식인들과 백성들은 일제의 탄압과 착취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만주로 떠돌아야만 했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공표하고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펼치자 일제의 억압에 짓눌렸던 독립정신이 되살아났다. 비폭력, 민족자결을 내세운 독립운동은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부산에서는 범어사 명정학교 학인스님들을 중심으로 한 동래장터, 며칠 후 일신여학교, 구포장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1 독립정신은 한때 반짝했던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내내 면면히 이어졌다.
1926년 2월 동래고보 기숙사에 있던 학생 한 명이 사감 선생을 찾아가 "음력 섣달 그믐날 밤이라 몹시 쓸쓸하므로 빵이라도 좀 사주세요"라고 말했다. 이에 당직 사감 일본인 마쓰다는 "조선 사람들은 걸인 근성이 있다"며 크게 꾸짖었다. 이 사실을 정인섭 선생이 알게 돼 마쓰다를 찾아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인데, 학생 면전에서 민족 모욕 발언을 하는 너도 교육자냐"라며 막대기를 휘두르자 마쓰다는 달아났다. 이 소문이 전교생에게 퍼지자 학생들은 격분하여 해운대 장산 절골 계곡에 모여 촛불을 밝혀들고 마쓰다 배척을 결의하고 졸업이 임박한 5학년을 제외하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절골은 장산 폭포사 아래 양운폭포에서 대천공원 사이 계곡을 말한다.
학교 당국은 주동자 색출에 나서 많은 학생들이 처벌당하기에 이르렀다. 학생회장이었던 5학년 박영출 학생은 주동자임을 자처하여 졸업 1개월을 앞두고 퇴학을 당하였다. 박영출 의사는 일본 야마구찌 고교를 거쳐 경도제대에 재학 중 1930년 일본 유학생 귀국 강연회에서 조국 독립을 주창하다가 경찰에 수감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박 의사는 경찰에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6년 36세 나이로 옥사하고 말았다. 우리 정부는 1977년 박 의사의 공훈을 기려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이듬해 모교인 동래고에서 명예졸업장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절골 촛불 항일시위의 전통은 1940년 노다이 사건으로 이어졌다.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경남 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심판장 노다이를 비롯한 일본인 심판들은 실력이 뛰어난 동래중학(전신 동래고보)과 부산 제2 상업학교가 아닌 일본인 학교 편을 들었다. 분노한 양교 학생들은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구금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반여동 중리마을 출신 문인갑 선생은 이 사건 이후 조선청년독립당을 결성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44년 구포철교에서 일본 군용열차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돼 1년 동안이나 조사를 받다가 광복을 맞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오늘의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이름 모를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계절은 아직 겨울이지만 절골의 물소리는 유달리 경쾌하고 장산의 소나무는 한층 푸르러졌다. /언론인

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항일 촛불 시위 펼쳤던 장산 절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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