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 아래 울창한 송림과 수영강 … 인심 좋은 <재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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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8.10.05

 


해운대의 자연마을 재송동


베틀 윗머리 등잔불을
이 집 저 집서 밝히면


소나무 사이로 일렁이는
여름밤 반딧불처럼 장관


수영 팔경 중 하나인
'재송직화'라 불러


 ■ 재송마을
재송마을은 재송동의 자연마을로 본동마을이었다. 동부센트레빌아파트 위쪽 장산 서쪽 기슭이다. 재송마을은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로 동하면(東下面)의 제일 큰 마을이었다.
재송마을은 동래군 동면에 소속되어 있다가 1910년 부산부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동래군 남면에 편입됐다. 1942년에 다시 부산부에 편입되었고, 1946년 부산부 수영출장소에 소속되었다가 1957년 동래구에 편입된 후 1980년 해운대구 승격과 함께 편입되었다.
<동하면고문서> 중 <재송경부하단절목책> 제1엽에 의하면, '본면은 당초에 상단과 하단으로 분면할 적에 재송 한 마을과 다섯 마을을 합하여 한 면으로 하였는데 중년에 재송마을을 상단면으로 옮겨 부쳤다가 지금 다시 부근 사람들이 관청에 청원한 바를 따라 다시금 하단면에 부처 예전대로 한 면으로 하나니…'로 적혀있다. 또한 <동하면고문서> 중 <동하대동중절목책(1691년)>에 의하면, '동하면과 동상면으로 분면되면서 재송은 본래 동하면에 소속되었는데 중년에 일시 동상면으로 이속하였다가 다시 동하면으로 이속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04년 간행한 <경상남도동래군가호안>에 의하면, '동하면 관내에 재송동이 있다. 당시 재송동의 호수는 54호다. 김·정(鄭)·이·정(丁)·강·허 씨 등 성씨가 살고 있었다'라고 적혀있다.
재송마을은 장산 아래 울창한 넓은 송림을 등지고 앞으로는 수영강이 수영만으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산수에 쌓인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농촌이었다. 주민들의 인심은 유달리 순박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수영강과 송림 사이의 농지를 이용한 농사를 짓고 넓은 송림을 이용한 반농반림(半農半林)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강 건너편에 좌수영이 있어 국가 소유의 토지인 둔답이 있었고 사창(조선시대 각 고을에 곡식을 쌓아두던 곳집)이 있었다.
장산의 남서산록에서 발원하여 수영강으로 흘러드는 소하천 계곡인 당줏골, 수영강 하류 재송포로 흘러드는 소하천 골짜기인 조선골도 있었다. 조선시대 때는 소형 선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조선골로 불리게 됐다.
전통마을이었던 재송동 지역도 1980년 이후 정책이주·주택조성 지역으로 지정되어 30만 평이 구획 정리되었으며 아파트 단지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 도시화되었다.
수영비행장 터에 센텀시티가 조성되었고, 마을 중심가에 동부센트레빌, e-편한세상 아파트 등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면서 옛 마을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재송마을 부녀자들의 베 짜는 길쌈은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밤에 베틀 윗머리에 등잔불을 이 집 저 집에서 밝혔으니, 수영강 건너편 좌수영 성에서 바라볼 때면 소나무 사이로 일렁이는 여름밤의 반딧불처럼 보여 장관이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수영 팔경 중 하나인 '재송직화(栽松織火)'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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