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역사 속 인물 - 효와 충절의 고장 해운대를 빛낸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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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8.11.08

반송동 '효녀 김 씨'
운봉마을에는 효녀 김 씨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유교적 인간상 정립을 위한 삼강오륜을 실천한 교훈적 이야기다.
만호 김보윤의 딸인 김 씨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그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하늘을 우러러 "만약 하늘이 도우지 않으면 나는 응당 죽으리라"고 맹세했다. 그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그의 동생에게 "너는 어머니를 섬기고 살아라, 나는 죽어 아버지를 섬기겠다"라 말하고 목을 매 죽었다. 1491년(성종 22)에 나라에서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마을 입구에 문을 세워 표창함)를 세워줬다.
효녀 김 씨 묘는 운봉산 기슭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그 무덤을 파헤쳐 놓았다. 임진왜란 후 어느 날 밤 수사(水使)의 꿈에 김 씨가 나타나 "저는 효녀 김 씨로 불행히도 저의 묘가 왜적에 파헤쳐짐을 입어 뼈가 드러난 지 오래인데도 뼈를 모아 묻어 주는 이 없으니 원컨대 뼈를 거두어 묻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말했다.
수사가 놀라 잠에서 깨어 이상히 여기고 다음날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효녀 김 씨의 묘가 운봉산 기슭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가보게 했더니 묘가 파헤쳐져 있었다. 뼈를 거두어 옛 무덤에 잘 묻고 제사를 지내주고는 돌아왔다. 그날 밤 김 씨가 다시 수사의 꿈에 나타나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반여동 '류심'
조선 중기에 동래부사를 지낸 류심(1649~1651 재임)은 본관이 전주인데, 전창위 정량의 아들로 어머니는 선조의 딸 정휘 옹주이며, 자는 증보이고 호는 도계(道溪)다.
증광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고 서장관과 부사(副使)로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경상도·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 강화유수, 도승지를 역임했다. 문장과 서예 송설체에 뛰어 났다.
류심은 1649년(효종 1) 11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해 1651년(효종 2) 7월에 경상도관찰사로 승차(陞差)했는데, 부임 때 전생의 어머니를 만났다는 인도환생(人道還生) 전설의 주인공으로 부산박물관 뜰에 있는 공의 만고불망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공은 집무를 마치고 시간만 나면 굴바이 앞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와서 낚시를 했다. 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승차한 후인 1651년 9월에 주민들이 '부사류심선정비'를 세워 공덕을 기렸다.


반여동 '송 선생'
삼어마을에는 서당 훈장을 지낸 송 선생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1800년경 삼어마을 서당 훈장을 한 송 선생은 후손이 없어 '내 재산 논 200평을 마을에 기증하니 제사를 지내 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삼어학계 일동은 송 선생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재산을 처분해 1979년 4월 5일 옥봉산 기슭, 묘에 '훈장송선생지묘' 비를 세우고 그 뜻을 기렸다. 성묘와 제사는 매년 음력 7월 25일을 기준한 일요일에 마을 주민들이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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