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나라 지키고 효행 실천한 석대동 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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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20.01.06

중국 하남성 천암
영양 천 씨 시조

9대 손 천만리 장군
임진왜란 때 왜적 물리쳐
충장공 시호 받아

병자호란 때 석대로 피란
영양 천 씨 석대동파 시작

다섯 효자와 효부 배출

살신성인으로 위독한
부모님 생명 구하고
여묘살이 곁 샘물 솟아나
천 씨 일가 효심에 감동한
하늘이 내린 효자천이라 불려

석대동(지금은 반송1동)에 영양(穎陽) 천(千)씨 집성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반여농산물시장과 화훼단지 인근 마을에 거주하는 17대 종손 천문갑 씨를 만났다. 그는 부인과 함께 담배와 음료수, 주류 등을 판매하며 소일하고 있었는데 영락없는 벽촌 가게 모습이었다. 그러나 문중 이야기가 나오자 꼼꼼하게 준비한 인쇄물을 챙겨준다. 동래고등학교를 다녔고 동래향교 장의를 거쳐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상임부의장을 맡은 유림답게 눈빛이 형형해진다.
영양 천 씨의 시조는 중국 하남성 지역 관리였던 천암이며, 9대 손인 천만리(千萬里) 장군이 중시조다. 천만리 장군은 무과에 장원급제해 총절사가 되어 몽골군을 격퇴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참소를 입어 귀양살이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병영양사 겸 총독장으로 두 아들과 함께 이여송 장군을 따라 조선에 왔다. 명나라 군량업무 총책임자였다.
곽산 전투에서 대승을 했고 충청도 직산, 울산 전투에서도 왜적을 물리쳤다. 선조 임금은 그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며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장군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서 계속 살다가 훗날 충장공(忠壯公) 시호를 받았다. 충(忠)은 나라를 염려하여 집안을 잊음이요, 장(壯)은 적을 물리쳐 난을 극복함을 뜻한다고 한다. 필자의 장모님이 화산 천씨라고 하셔서, 화산이 도대체 어디인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 유래를 알게 되었다.
명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강성해진 만주의 후금(後金)의 세력은 국호를 청(淸)나라로 바꾸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병자호란이었다. 남한산성에 피신해있던 인조 임금은 결국 무릎을 꿇었고, 강화조약에 명나라 사람들을 잡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1662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당하자 조선에 귀화했던 명나라 사람들은 심산유곡으로 피신하였다. 천만리의 4대 손 천찬석은 안악 군수와 황주 목사를 거쳐 경기도 광주 부윤을 지내던 중 동래부 석대로 피란해 영양 천씨 석대동파가 시작되었다. 국력이 약해지면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석대동 천 씨 집안은 1746년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효자 5명과 효부 1명을 잇따라 배출했다. 효자 천성태는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36년을 더 살게 하였고 아버지가 위독하자 같은 방법으로 수명을 6년 연장시켰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여묘살이를 했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호위하였다고 한다.
아들 천세모는 호랑이를 만난 부친을 구했고, 손자 천술운과 증손자 천상련, 고손자 천우형은 여묘살이 하던 중 여막 곁에서 샘물이 솟아나 사람들이 그 샘을 효자천이라고 불렀다. 천우형의 처 김해 김씨는 조상의 분묘 근처에 다른 집안에서 묘를 조성하자 이를 파헤치고 관가에 자수하였다. 이 집안의 가훈은 가정의 법도는 충성과 장렬과 효도를 근본으로 한다. 가정을 다스리는 교훈은 참되고, 굳건하고, 공부하고, 실행하고, 바르고, 화목하고, 참고, 부지런함을 으뜸으로 한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에 상납금을 내야 효자 정려(旌閭)를 받을 수 있었는데 가난한 후손들은 형편이 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가서야 성균관 오륜행실중간소로부터 인정을 받아 포창완의문이 발급되었다. 정려각은 1960년에야 반송 입구에 세워졌으나 도로공사로 일시 철거됐다. 1988년 다시 세워진 게 오늘날의 5효자 1효부 정려각이다. 입향조 천찬석의 묘소도 인근에 있다.
이 문중은 대대로 내려오던 보물 같은 문헌들을 2006년 271점, 2007년 120점 등 모두 391점을 부산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포창완의문을 비롯, 효행정려 요청문서, 호구단자, 준호구, 호적표 등이다. 박물관측은 도록 1천 부를 발간하였다. 도난이나 화재로 소실될 위험이 있다는 전문가들의 권유를 받아들인 결과이지만 조선 후기 및 일제강점기 사회를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임이 틀림없다. 반송과 기장으로 향하는 차량들은 무심하게 지나가지만 효행과 사회적 공헌을 실천하는 명문가가 있을 줄이야. 효는 유교사회 뿐 아니라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근본덕목이 아닌가.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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