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명문 동래 정(鄭)씨 해운대파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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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19.10.29

동래 본관 정창두 씨
집안의 19세기 고문헌
애지중지 소장

3.1운동 사용 태극기
독립기념관에 기증

그 많았던 가산
독립군 군자금으로


뿌리의식이 깊었던 한국인들은 사회적 관계를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을 중심으로 형성해왔다. 본관이 어디인 무슨 성씨냐, 어느 학교에 다녔느냐에 따라 친소관계가 달라졌다. 지금이야 거주 이동과 직업 선택이 자유롭고, 사회적 관계망이 워낙 발달되어 있어 뿌리의식이 느슨해졌다.
우리나라의 성씨 가운데 김해 김씨가 445만 명, 이어 밀양 박씨, 전주 이씨 순으로 이어지다가 부산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정(鄭)씨가 47만 5천 명으로 17번째로 인구가 많았다. 2016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결과다. 동래 정씨가 인구수에 비해 이름을 날린 가문이 된 것은 조선시대 재상 17명, 대제학 2명, 호당(문신 가문 가운데 문학이 뛰어난 사람에게 학업을 닦게 했던 서재, 지금의 엘리트 양성 제도) 6명, 공신 4명, 판서 20여 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왕손인 전주 이씨가 배출한 재상이 22명이었는데 동래 정씨 17명은 이에 버금가는 명문이었음을 말해준다. 동래 정씨는 신라시대 경주를 본관으로 하다가 동래로 분적되어 동래군의 향직을 맡았던 정회문을 시조로 하고 고려 전기 때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을 1세로 한다. 그 아들 정문도의 묘소는 화지산에 있으며 화지공원 역내에 동래 정씨의 사당 정묘사가 자리잡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호장공파 정선문이 17세 때 동래 거제에서 해운대 오산 마을로 입향하였다. 동래 정씨의 다른 분파는 양산 법기리에서 동래 구서동으로, 또 반여동으로, 기장에서 반송 운봉마을로 옮겨 거주했다.
해운대 우동 못안마을(해운대 도서관 분원 근처)에서 자라 지금은 좌동의 아파트로 이주한 정창두 씨(72)는 이 집안의 고문헌과 각종 서간문을 애지중지 소장해온 장본인이다. 그 문서의 가치와 의미, 노고를 분석하고 인증해준 이는 동아대 이훈상 교수다. 이 교수가 민선희 당시 고신대 강사와 함께 1995년 부산광역시사 편찬위원회가 펴낸 학술지 항도 부산에 19세기 동래부 동하면 못골의 동래 정씨와 이들의 고문서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조선 철종 무렵인 1820년대 이 가문은 해운대 우동으로 들어와 부를 일구었다. 우동 못안마을 일대 약 30만 평 토지가 이 집안의 소유로 천석군이었다고 한다. 부가 축적되자 정부명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동래향교에 출입하게 되었고 양반 대접도 받았으며 향임(鄕任)도 맡았다. 고조부 재하 할아버지는 유학서원 장의를, 증조부 귀조 할아버지는 도유사, 민의소 의원, 조부 정출 할아버지는 교임, 서원제집사를 지냈다.
그러니 고문서와 고문헌이 많을 수밖에. 소장한 호적류는 준호구, 신호구, 일제시기 민적부를 합쳐 1828년부터 1908년까지 모두 34장이다. 각종 제례에 집례자로 천거될 때나 동래부 민의소 의원의 천거문 등 천지(薦旨)가 10장, 혼사와 관련되었거나 안부를 묻는 서간문 17점, 타 지역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문(詩文), 시문과 관련된 상장이 8점이다. 통문과 제문, 동계(洞契)운영문서, 금융조합 및 부동산 관련 문서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1919년 3.1운동 때 동래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하기 위해 동래군청에서 가져온 일장기로 정귀조, 봉조, 임조 세 형제가 우동 자택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는데 궤의 모양이 파리 포스담 회담 때 사용한 태극기와 동일하다고 독립기념관 학예사로부터 검증받았고 문화재 등재 절차를 밟고 있다. 정창두 씨가 보관해오던 태극기는 2017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으며 2년째 연례행사로 특별전시되었다.
동래 정씨 우동 가문의 그 많았던 가산은 4대조 귀조 할아버지가 금강산 온정리 땅콩농장에 대부분 투자하였다가 기울기 시작했다. 후손들과 독립기념관 연구원들은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해 농장 경영자금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는 독립군 군자금이었으리라 추정하나, 물증을 찾기 쉽지 않다고 한다.
정창두 선생은 "가세가 기우니 어릴 때 제대로 먹지 못해 병원 신세를 자주 졌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운촌 마을 출신인 아내 박순옥 여사는 남편의 해운대 초등학교 1년 후배다. "애로사항이 많지 않았느냐"며 물으니 "1년에 제사가 13차례이고 책과 문서를 말릴 때 힘이 들었다"고 하고는 말문을 닫았다. 종갓집 맏며느리의 고충은 어느 가문이나 마찬가지리. 봉래산보다 나은 곳이 이 산중에 있으니/누가 은하수 잘라내어 푸른 하늘 물 뿌려내는가/층층절벽 구슬 같은 물방울 떨어지고/가파른 골짜기 바람소리 벽력처럼 웅장하다… 4대조 정귀조의 동생 정봉조의 한시 장산폭의 앞 구절이다.
/ 언론인

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명문 동래 정(鄭)씨 해운대파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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