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가슴 아픈 역사, 포로수용소와 월남난민보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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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19.11.15

반여동 포로수용소
한국전쟁 상흔 딛고
아파트촌으로 상전벽해

75년 베트남 보트 피플
재송동 난민 보호소 정착
93년 16년 만에 폐쇄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잘 있거라/우리는 전진한다…
현인 선생의 가요 전우야 잘 자라에 표현되었듯, 6.25 전쟁 때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버티고 버티던 국군은 경북 칠곡 다부동에서 격전을 벌인 뒤 북으로 진격하였다.
수많은 인민군 포로가 붙잡혔다. 전쟁 발발 이후 가장 먼저 만들어진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에 세워진 대전 포로수용소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포로수용소도 대구로 이전하였다. 부산 영도 해동중학교에도 세워졌고 나중엔 거제리 포로수용소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반여동에도 수용소가 세워졌다. 1950년 벼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라고 전해지니, 10월 무렵이 아니었을까. 논과 밭, 야산까지 약 3만 평의 토지를 미군이 징발해 수용소를 건립했다. 주민들이 강제징발을 막기 위해 군 장비 앞에 드러눕기도 했지만 양성봉 당시 경남도지사의 설득으로 미군과 농민들 사이에 보상 문제가 논의되었다고 한다.
포로수용소는 3년 정도 운영되었는데 2천~1만 명가량 수용되었다. 함께 설치된 유엔 연합군 교육대에서는 연합군의 기본 교육과 훈련이 이뤄졌다. 반여동을 포함, 거제리 등 부산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5만여 명은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가 건설되자 모두 옮겨갔고, 반여동 수용소는 유엔군 유격대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가 나중에 육군 병기학교가 들어섰다.
이 부지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선수촌 아파트가 건립돼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로 바뀐 셈이다. 아시안게임 참가국들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고 단지 곳곳에 조각 작품들이 주민들에게 빙그레 웃음 짓는다. 포로수용소라는 가슴 아픈 역사는 점점 잊혀져 간다.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 인근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방문한 적 있다.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입구에 걸려있고 고압전류가 흘렀던 2중 철조망이 방문객들을 긴장시켰다. 인종 차별, 학살, 가스실, 잿빛 화장터 등 잔혹의 극치에 달한 단어들이 이곳을 설명해주었다. 유태인 400만 명이 나치에 의해 숨진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고 역사 학습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반여동 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북한 노래를 부르며 향수를 달랬고, 훗날 반공포로는 석방이 이뤄졌다.
부산은 또 다른 전쟁의 아픔이 남아있던 곳이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월남의 패배로 끝나자 공산 치하에서 탄압을 피하기 위해 보트 피플이 줄을 이었다. 초기에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로의 이민이 순탄했으나 각국의 체류 불가 방침에 따라 이들은 망망대해를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부산시와 대한적십자사는 인도주의적 지원을 위해 부산 서대신동의 한 학교에 임시 체류시설을 개소했고, 난민이 급증하자 해운대구 재송동 1,983㎡ 부지에 조립식 건물 12개 동, 식당, 세면장 등 편의시설을 갖춘 난민 보호소를 건립하였다. 한 때 1천563명이 수용되었으나 584명은 한국인 연고자를 찾아 떠났고, 977명이 자유 우방국가로 새 보금자리를 찾아 이주하여 60여 명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격주에 한 번 인근 수영팔도시장에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외항선 전재용 선장이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지나해에서 난민 96명을 구조했는데, 직장을 그만 두어야만 했다. 생명의 은인이었던 전 선장을 잊지 못하던 옛 난민들이 새 정착지 미국에서 19년 만에 감격적인 포옹을 했다는 짧은 후일담만 접할 수 있었다. 1993년 잔류 난민 110명이 뉴질랜드로 떠나며 보호소는 16년 만에 폐쇄되었다.
최인훈 작가의 걸작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떠오른다. 남북을 오가면서 진정한 의미의 삶과 그 광장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찾지 못한다. 그는 포로송환 과정에서 남이냐, 북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지만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중립국을 택하게 된다. 포로를 싣고 가던 인도행 상선에서 칠흑 같은 남지나해에 뛰어들고 만다. 이념은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체제는 결코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전쟁이 과학기술문명의 발전을 촉진한다고 하지만 인류를 파멸시킬 뿐이다. 전쟁의 비극은 되풀이되어선 아니 된다. 그 어떤 명분이라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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