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이야기-느림의 미학, 지승공예 명인

null 게시물 상세 정보
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7.07.07

한지로 꼰 노끈 이용 생활용기 만들어
달맞이에 박물관 열어 250점 전시
전통 문화 복원에 40여 년 전념


 


종이 지(紙) 줄 승(繩), 지승 공예, 참 생소하다. 우리말로 노엮개라고 바꿔 불러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한지를 좁고 길게 자른 뒤 손끝으로 비벼 꼰 노끈으로 만든 생활용기를 뜻한다. 우리 선조들은 동구리, 반짇고리, 멜끈, 담배쌈지, 함지, 씨앗바구니, 붓통, 호리병, 발우, 모자, 옷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물을 만들었다. 심지어 화살통이나 종이갑옷, 투구도 만들었고, 미투리를 꼬아 신고 다녔다.
해운대구 중동 달맞이길 달맞이빌라에 자리 잡은 지승공예 박물관을 찾았다. 지승공예 명인 1호인 천혜당(天惠堂) 김금자 여사와 부군인 관장 이해원 선생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살림집인 빌라를 개조해 손수 만든 작품 250여 점을 전시해놓았다. 항아리, 옷, 미투리, 촛대, 부채 등 다양한 작품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지승공예 작품이 261점뿐인데 비하면 대단한 규모다.
천혜당 선생은 대학생 시절 궁중요리를 배우는 교수님을 따라 낙선재에 갔다가 예쁜 종이상자(반짇고리)를 보고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침선상궁으로부터 한지를 좁고 길게 잘라 꼬아서 만든 것인데 지금은 한지가 없으니 다음에 가르쳐 주마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았고, 결혼을 하며 자녀들 뒷바라지하느라 잊고 지냈다. 그러다 10여 년이 지나 서울 코엑스에서 공예품대전을 보게 되었는데 정교한 한지공예품을 만나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 후 한 달에 두어 번 씩 서울로 가 한지공예를 배웠고 공모전에 출품했으며, 지금은 전국한지공예대전 초대작가이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다 20여 년 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인 최영준 선생을 만나 지승공예에 빠져들어 밤을 새워가며 몰두하였다. 지승공예 장인(匠人)을 찾기 어려워 서울로, 원주로, 제주도 등지로 다녔다. 유물도 귀해 백방으로 찾았으나 겨우 10여 점을 구했을 뿐. 스승으로부터 귀동냥한 기법과 유물을 뜯어보며 배운 기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개발해왔다.
천혜당 선생은 옛 선비들은 공부하고 난 고서를 잘라 꼬아 다양한 기물을 만들었다며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므로 생계수단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니 후세에 기법이 전수되지 않았고, 일제 침략과 6.25 전쟁 등을 거치며 유물들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다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만든 노엮개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으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작품은 남아있다. 도산 선생은 1933년부터 2년 동안 대전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할 때 만든 구합발우(九合鉢盂)를 출옥하면서 조선인 간수장에게 감사의 뜻으로 전달했는데, 유족들이 2013년 흥사단에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천혜당 선생은 도산 선생의 작품이 자신이 만든 구합발우와 너무나 흡사해 깜짝 놀랐다고 한다.
노엮개는 지난한 작업이다. 엄지손가락 굵기의 항아리를 제작하는데 1주일 걸리며, 45㎝ 높이 달항아리는 6개월 걸린다. 지문이 닳아 없어진지 오래 되었다. 물을 담는 그릇 종류는 옻칠을 여러 번 해야 물이 새지 않는다. 천연 염색을 하여 고운 색을 입힌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얼마간 배우다가 그만 두기 일쑤다. 종이를 꼬고 엮으면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 선승(禪僧)이 따로 없다. 그래서인지 운문승가대학 학장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 회장인 명성스님이 6∼7년 전 지승공예박물관을 몇 차례 다녀갔다고 한다. 산사에서 노엮개를 하던 스님이 선생의 작품에 흠뻑 빠졌던 모양이다. 경력도 화려하다. 다도(茶道)와 전통한지공예 지도사범인데다 서예 초대작가이며 전국시조경창대회 국창부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공모전에서 50여 차례 수상하였으며, 한지공예 및 지승공예 개인전을 60회 가까이 개최한 바 있다.
해외 전시회도 일본 4회, 중국 3회, 미국과 프랑스, 대만 각 2회, 영국과 캐나다서 한 차례 열었다. 특히 2002년 5월 프랑스 파리 피에르 가르뎅 전시관에서 열린 한지공예 전시회에서 디자인 세계의 황제라고 불리는 피에르 가르뎅이 1시간 이상 작품을 감상하고 반짇고리를 구입해갔다. 당시 신문에서는 한지에 파리가 반하다라는 제목으로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고 한다. 선생은 지승공예의 우수성과 기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14년 노엮개, 천년의 숨결을 깨우다라는 책자를 펴냈다.
올해 우리 나이로 78세, 꿈이 무엇일까. 계보가 없으면 무형문화재로 인정하지 않는 부산시의 정책에 서운함을 표한다. 독학하다시피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새 길을 열었는데 계보가 있겠는가. 또 해운대 지역에 거주하는 각 분야의 이름난 장인들의 작품을 시민들에게 선보이는 공간이라도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혜당 선생의 딸 이정화 씨는 한지공예와 지승공예 작가로 어머니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장남 이원국 씨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를 지낸 발레리노다. 지금은 이원국 발레단 단장이다. 선생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 상도 받았다. 예술에 끼가 많은 집안이다.


언론인


박병곤의 해운대 이야기-느림의 미학, 지승공예 명인

첨부파일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1유형:출처표시 박병곤의 해운대 이야기-느림의 미학, 지승공예 명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