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불멸의 신화 <5>장산 주봉(군봉,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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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5.07.06

고향사람을 도륙할 수도 없고 왕명거역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일


해운대구는 해운대를 이야기가 흐르는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와 함께 지역 내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국제신문에 게재된 글로, 6회에 걸쳐 해운대 불멸의 신화를 연재한다.


거도장군은 깊이 고심했다
왜 하필 고향을 치란 말인가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곳
그곳만은 꼭 지키고 싶었다


살육의 전쟁만은 피하자
남들 몰래 서신을 띄웠다
밀서를 받아든 검투장군은
쫙쫙 찢어 불태워 버리고 …


마침내 신라의 기병들이
장산국으로 밀려들었다
어린시절 함께 뛰고 놀았던
동무 간의 전투가 시작됐다


I
신라 4대 탈해 이사금(서기 57년~80년) 시기.
어느 날, 탈해왕은 거도(居道) 장군을 은밀히 내실로 불러들였다. 말을 타고 한달음에 궁궐로 달려온 장군은 황망한 심정으로 왕과의 독대를 받들었다. 거도 장군이 머리를 땅에 박고 왕 앞에 엎드렸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왕의 얼굴은 근심에 휩싸여 있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어두운 표정이었다. 장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왕의 근심거리가 무어란 말인가? 그즈음 신라는 백제와 가락국을 힘껏 압박하고 있었다. 백제에 함락되었던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되찾았고, 기병 2000 명을 보내 구양성 공격을 물리쳤다. 얼마 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귀에서 가락국 병사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왕의 세(勢)는 거침없었다. 왕의 막강한 힘은 철을 다루는 야장(冶匠)의 기술에서 비롯되었다. 왕은 나라 곳곳에 대장간을 짓고 덩이쇠를 녹여 병장기를 만들어 냈다. 바야흐로 철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왕은 신라뿐 아니라 인근 부족국가의 백성들에게도 두려움과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신라는 더 이상 가락국에 철 생산을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장산국 말이오.
거도 장군은 엎드린 채 왕의 명을 기다렸다. 거길 정복해야겠소. 무슨 묘수가 없겠소?
거도 장군이 깜짝 놀라 머리를 쳐들었다가 황황히 엎드렸다. 장군의 심장이 시꺼멓게 타들어갔다. 장산국의 평화로운 읍락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왜 하필 장산국이란 말인가.
왕은 말을 멈추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은 지금 당장 눈앞에 묘책을 내놓기를 원하고 있었다. 장군의 머릿속으로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장토(기장) 벌판에 병사들을 모아놓고 마숙(馬叔)을 시키겠나이다.
오호? 적은 마음을 놓고 방비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런 후엔 날랜 기병을 보내 단번에 적을 무너뜨리겠사옵니다.
허어, 말타기 놀이를 하다가 기습공격을 가한다. 거참, 그럴듯한 생각이오.
하오나 전하, 적이 마숙을 연례행사로 여기려면 다소 시일이 걸릴 것이옵니다. 좋소, 이번 정벌은 장군이 맡아 지휘하도록 하시오.
거도 장군은 엎드려 절한 후 왕의 면전에서 물러났다.
국경 막사로 돌아온 거도 장군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산국의 정벌 시기를 몇 해 뒤로 미루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왕을 떠올리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탈해왕은 그가 목숨을 바쳐 충성해야 할 왕이자 은인이었다.
거도는 장산국 장군봉(주봉)의 아랫마을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장군봉은 장군대좌의 명당을 거느린 장산의 봉우리였다. 앞은 중군이 진을 치고, 좌로는 군도가, 북으로는 깃발이, 그리고 북서쪽으로는 군마가 달리는 형상을 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득한 시절부터 사람들은 장군봉의 정기를 받은 대장군들이 기슭동네에서 탄생할 거라 믿었다.
거도는 태어날 때부터 몸집이 거구였다. 열 살 무렵, 맨손으로 산짐승을 때려잡을 만큼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대장군이 태어났다고 남몰래 쉬쉬거렸다. 미천한 출신의 거도를 장군감이라고 감히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열다섯 살에 홀어머니가 죽자 거도는 답답한 고향 마을을 떠나 주변국 산천을 떠돌기 시작했다.
스무 살 때 거도는 신라 국경 부근에서 백제와의 전투에 참가했다. 거대한 몸집의 거도가 백제와의 전투에서 거듭 공을 세우자 탈해왕이 그를 눈여겨보았다. 어쩌면 왕은 젊은 거도를 통해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렸는지도 몰랐다. 탈해왕 역시 신라 국경을 넘어 타국에서 흘러들어온 이방인이었고, 9척의 어마어마한 키와 풍채를 갖춘 거인이었다. 탈해왕은 신라의 토착세력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왕은 거도의 출신을 묻지 않았고, 그의 용맹과 지략만을 취했다. 몇 년 후, 왕은 거도에게 태수 직을 하사했고, 신라 서남쪽 국경의 수호를 맡겼다.
왕을 독대하고 온 거도 장군은 며칠 동안 막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신라와 고향 장산국 사이에서 그의 고뇌가 깊었다. 장산국을 공격해 고향사람들을 모조리 도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신라왕의 지엄한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거도 장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고통과 갈등을 느꼈다.


II
몇 해가 흘렀다. 장산국의 검투(劍鬪) 장군은 군막에서 세작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군막은 장군봉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방형과 직사각형의 화강석에 모래와 진흙을 개어 만든 튼튼한 군막이었다.
세작의 소식은 의심할 바 없는 적군의 술책이었다. 국경에서 또다시 말 타기 놀이를 하다니! 분명 신라왕의 요사스런 간계가 숨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지휘관이 거도라 했느냐?
예, 장군.
검투 장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거도는 탈해왕이 즉위한 후부터 국경의 태수 직을 맡아온 자였다. 그런 그가 어쩐 일인지 몇 해 전부터 남몰래 밀서를 보내오고 있었다.
너는 돌아가 염탐을 계속하거라. 그리고 내일 이 시각에 다시 보고하거라.
세작이 떠난 후, 검투 장군은 거도의 밀서를 꺼냈다. 그는 거듭 항복을 종용하고 있었다. 거도의 논리는 분명했다. 가락국에 조공을 올리는 작금의 상황이나, 신라의 복속국이 되는 일이나, 무엇이 그리 크게 다른가. 중요한 건 전쟁을 피하고 부족민들이 도륙당하는 걸 막는 일 아니겠는가. 장산국의 평화로운 산천과 읍락을 조목조목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항복을 받아내려는 적장의 간교한 술수라고 보기에는 절실한 그 무언가가 느껴졌다. 검투 장군은 힘껏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밀서를 쫙쫙 찢어 화로에 던져 넣었다.
검투 장군은 장산국 시조(始祖)인 고씨 일가의 후손이자 왕족이었다. 천상에 거주하는 시조가 부족을 지키기 위해 장군을 지상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는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선왕의 공주였던 장군의 어머니가 장군봉 아랫마을에서 그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골이 장대했고, 지략이 빼어났으며, 각국의 판세를 읽을 줄 알았다. 부족민들은 검투 장군이 장산국을 수호해줄 것을 굳게 믿었다. 검투 장군이야말로 장군봉 본래의 정기와 기개를 받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검투 장군은 군막을 나왔다. 멀리 금정산의 완만한 능선과 골짜기가 보였고, 오른편 산등성이 너머로는 장산의 정상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부족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검투 장군의 시름이 깊었다.
검투 장군이 보기에 탈해왕은 잔인하고 위험한 인물이었다. 백제로부터 와산성을 되찾았을 때 그는 성안에 남은 백제 백성 200명을 모조리 죽여 흙구덩이에 던졌다. 죽은 이들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어린아이와 노인과 아녀자가 대부분이었다.
기실, 주변의 모든 왕국과 왕들이 위험했다. 어떤 왕이든 전쟁이 끝나면 복속국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살해했다. 신라든 백제든 가락국이든, 그들의 의도는 단 한가지였다. 장산국을 복속시킨 후 이곳을 발판 삼아 영토를 넓히는 거였다. 검투 장군은 생각에 잠겨 산길을 내려왔다. 군졸 두 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마을 입구 들어서자 밥 짓는 냄새가 고소했다. 투구 모양의 장군봉 기슭 너머, 오목하고 넓은 구릉지에 자리 잡은 읍락이었다. 먹을 것이 풍부했고 평화로웠다. 곡식이 여물지 않은 춘궁기나 눈 내리는 겨울에도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았다. 사시사철 동천(수영강)에서 잡은 물고기로 양식을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투 장군은 왕실로 향했다. 옥좌에 앉은 고씨 여왕이 그를 맞이했다. 여왕은 장군의 사촌 누이이자 부인이었다.
어서 오세요. 장군.
전하. 장토야 국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나이다.
오호호호. 여왕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찰랑찰랑. 장신구에 매달린 옥구슬들이 부딪쳤다.
신라인들이 마숙놀이를 한다지요? 염려하지 마세요. 연례행사인 거지요.
전하. 지금 당장 가락국에 연통을….
나는 내일 시조묘에 제사를 드리러 갑니다. 제를 올리고 부국안녕을 기원해야지요. 오늘은 일찍 쉬어야겠어요.
장군은 여왕에게 절을 한 후 물러났다. 왕궁 뒤편의 병락갓(연병장)에 이르자 와와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렸다. 담장 안에서 말울음 소리와 병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장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장군이 나타나자 젊은 군장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지금, 뭣들 하고 있는 거냐? 호통소리에 군장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훈련을 마친 후 군사들이 말 타기 놀이를 한다기에….
장군이 채찍을 들어 군장의 머리통을 갈겼다.
당장 멈추어라. 작금이 어느 때이더냐. 부족의 운명이 위태롭단 말이다!
장군의 호령이 쩌렁쩌렁했다. 놀란 병사들이 하나 둘 말에서 내렸고, 콧김을 내품으며 달리던 말들은 고삐를 잡힌 채 앞발을 쳐들고 힝힝거렸다. 병락갓 안이 조용해졌다.
이틀 후면 신라인들의 마숙놀이가 시작된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훈련이 끝난 후에도 군복을 벗지 않을 것이다.
병사들이 숨을 죽였다.
우리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장산국을 지킬 것이다. 저 간악한 신라왕으로부터 부족민들을 구할 것이다!



신라 탈해 이사금 23년(서기 79년).
장토 벌판에서 출발한 수백의 신라 기병이 장산국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활통을 등에 멘 신라 기병들은 옆구리에 칼을 차고 장창을 한 손에 쥐고 달려왔다. 궁수도 보병도 없는 기병들만의 출정이었다.
장산국의 군진(軍陣)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검투 장군이 사력을 다해 북을 치고 깃발을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긴 창과 화살로 무장한 기병들을 칼이나 손도끼를 든 보병들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진을 무너뜨리고 거리를 좁힌 신라 기병들이 말 위에서 칼을 빼들고 육박전에 돌입했다.
검투 장군은 최후까지 항전했다. 온몸에 화살이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터졌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칼을 휘둘렀다. 검투 장군의 목을 벤 이는 거도 장군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비록 신분이 달랐지만 장군봉 아랫마을에서 함께 자란 어린 시절의 동무였다.
검투 장군의 목에서 피가 솟구친 순간, 장군봉의 초목들이 일제히 우우우 울음소리를 냈다. 거도 장군이 장군봉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시울이 붉었다. 거도 장군은 고개를 숙여 적장의 수급에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정예의 기병부대를 이끌고 여왕의 처소인 국읍으로 향했다.


 ■ 황은덕 소설가


해운대 불멸의 신화 <5>장산 주봉(군봉,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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