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이야기- 애국지사 강근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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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5.06.04

청산리대첩의 큰 별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
수많은 선열의 희생 덕분


떡이며 과일, 갈증을 달래줄 술병 하나 담은 배낭을 짊어졌다. 대천공원에서 확성기 소리가 요란했다. 가족을 테마로 내세운 무슨 단체 행사가 열렸는가 보다. 왁자지껄한 소음은 듣기에 거북했으나 어른 아이 함께 어울린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장산사 거쳐 폭포사 입구, 오색 연등이 나들이객들을 환영하는 듯 손짓한다. 양운폭포 물소리 또한 제법 우렁차다.
그 무엇보다도 이즈음의 자랑거리는 신록이다. 고은 시인이 사랑을 하려면 5월의 산에서 하라고 한 까닭이나, 이양하 선생이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다고 한 연유가 바로 싱그러운 녹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체육공원 갈림길에서 오른 쪽으로 10여 분 올라가니 태극기가 여러 장 펄럭이는 돌담집이 나온다. 애국지사 강근호 님의 집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마당 입구에는 육군 53사단에서 세운 추모비와 빛바랜 꽃 몇 송이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아래채는 창고인 듯 보이고, 기념관으로 꾸몄다는 본채는 문이 잠겨있다. 아쉽게도 관리인조차 없는지 적막하기만 하다. 추모비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잠시 목례를 드렸다.
강근호 지사는 1898년 함경남도 정평에서 태어나 중학 3학년 때 반일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만주로 망명해, 1919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나이 22세 때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의 선임 중대장을 맡아 청산리 대첩에 참전하였다. 독립군 650여 명이 일본 정규군 1,600여 명을 사상시키는 압승을 거두었다. 강 지사는 러시아 흑하사변 때 러시아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이후 1949년 51세에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했고, 6.25 전쟁이 일어나자 강원도 양구 103사단에서 복무하였다. 이 부대에서 여군으로 근무하던 34세 아래인 이정희 여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이 여사는 1932년 충남 대덕군에서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선생의 증손녀로 태어났다. 여고 재학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증조부를 찾아 대구로 피난 갔다가 학도의용군에 입대했고 이어 여군 2기로 자원입대했던 것이다. 1956년 강 지사가 전역을 하고 부부는 부산 영도 영선동에서 4년 동안 거주했으나 강 지사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계가 막막했던 이 여사는 강 지사의 미국 무공훈장을 갖고 미군 하야리아부대 사령관을 찾아가 하소연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아원 보육사로 일하기도 했고,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재건국민운동 간부를 지냈다. 1964년부터는 장산개척단 단장을 맡아 단원들이 임야 50여만 평에서 농사를 짓도록 하고 젖소 400여 마리를 사육하게 하였다.
장산 생활을 시작한 이 여사는 자신의 거처를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는 동산이라는 의미로 모정원이라고 이름 짓고, 장산개척단 일과 함께 남편이 독립유공자로 추서 받을 수 있도록 동분서주하였다. 결국 강 지사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고,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국장, 은성무공훈장을 추서 받게 되었다.
강 지사는 평소 입버릇처럼 내 자식들이 성장하면 만주벌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강 지사의 염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여사의 구술과 김재승 박사의 노력으로 2002년 전기(傳記)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이 출간되었다. 이 여사의 노력이 없었다면 강 지사는 물론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거룩한 희생이 잊혀졌으리라. 해운대구가 대천공원에서 모정원까지 2㎞ 구간을 애국지사 강근호 길이라고 명명하고, 강 지사의 활약상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한다고 한다.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밤새 내 외로움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모윤숙 시인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생각나는 6월이다.
하산 길, 춘천 상류 절골의 물소리는 초여름 더위를 씻어주고, 앞을 다투며 지저귀는 새소리는 강 지사의 넋을 위무하는 듯하다. 이양하 선생은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운다고 질타했는데,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수많은 선열들의 희생 덕분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부끄럽기만 하다.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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