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는 내가 콕 찍은 유랑 여정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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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4.05.12

해운대구는 해운대를 이야기가 흐르는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와 함께 지역 내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국제신문에 게재된 글로, 6회에 걸쳐 해운대 고운 이야기를 연재한다.


<1> 최치원의 유량루트 


아버지 종용으로 떠난 중국 유학 唐 과거 합격, 출세길 달렸지만 고국 신라 흙냄새가 그리워 귀국


부정부패가 판치는 정치에 염증 태수 관직도 미련없이 내던지고 전국돌며 발길·마음 닿는 곳마다 수많은 시문·문장·비문을 남겼다


나의 말년 행적은 누구도 몰라 어떤 이는 구름이 되었다 하고 누구는 신선이 되었다고 하지


후대 전국 10여 곳의 지자체들 내가 지나간 곳마다 문화마케팅 해운대 지명도 나로 인해 유래 보라, 천년 전설로 살아 있음을


떠도는 몸이라 정처가 있을 수 없지만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발길이 절로 남쪽으로 향한다. 운수납자(雲水衲子)의 심경이 이러할까. 구름같이 떠돌며 흐르는 물같이 살아야 하리라. 망망대해, 아득히 열린 바다로다. 가슴이 툭 트인다. 수평선 끝의 하늘빛이 가없이 푸르다. 눈이 시리다. 공평과 조화의 땅, 영구망해(靈龜望海: 신령스러운 거북이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의 복지로다. 예가 어딘가. 장산국의 옛터, 신라 거칠산군, 동래현(봉래현)의 해변. 바람이 그윽하고 감미롭다. 한 자 써볼거나. 오, 海雲(해운)!


#1. 외로운 구름은 내 운명
미스터리다. 나(최치원: 857~?)의 만년 행적은 나도 모른다. 이르건대 바다 구름이요 외로운 구름이다. 내 자(字)가 해운(海雲)·고운(孤雲)이니 이것도 운명일텐가. 구름은 나의 벗. 나는 구름과 바람 사이에서 나를 놓아버렸다.
나의 생몰 연표에 ?(물음표)를 찍은 것은 나를 놓고 풀기 위함이다. ?표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지만 그 또한 내 운명. 어떤 이는 구름이 되었다 하고, 누구는 신선이 되었다 한다. 실종설, 증발설, 자살설까지 나도는구나. 발 없는 소문이 천리를 가고, 입 없는 전설이 천년을 건너왔다. 소문과 전설이 마침내 숲을 이루니 길이 없어도 길이 되었다.
득난(得難), 얻기가 어렵도다. 내게 6두품은 득난이었고, 5두품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 이제와서 두품의 높고 낮음이 무슨 소용이랴. 떠나려는 자에게 권력과 명예, 부귀영화는 한낱 구름일 터. 정의와 직언이 누적된 모순을 이기지 못하니 난세로다. 그래 떠나자, 마음 가는데로 발길 닿는대로 훌훌 털고 떠나는 거다.


#2. 유학과 유랑
내 고향은 경주다. 아버지는 경주 사량부 출신의 견일(肩逸)이란 분으로, 숭복사 창건에 관계한 바 있다. 황룡사 남쪽에 집터에 남아 있었는데 후에 없어졌다(삼국유사 기록). 아버지는 내게 조기유학을 종용했다. 6두품이 경륜을 펼치려면 당나라에서 떡하니 과거에 급제하여 그 권위로 뜻을 펴는 것뿐이었다. 골품제가 유학 바람을 조성했다. 열두 살 때 난 당나라로 들어갔다. 떠날 때 아버지는 말했다. 성공하지 않으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마라!
아버지의 다그침을 떠올리며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18세때 당나라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 등지를 유랑하며 시를 썼다. 나의 유랑벽은 이때부터 싹이 튼 듯하다. 그후 879년 황소의 난 때 격문을 지어올렸는데, 세상이 찬탄했다. 당나라 생활도 어언 17년. 눌러앉지 않을 바에야 돌아가야 했다. 고향의 흙냄새가 그리웠다. 29세때 신라로 귀국했다. 신라 말기 국정은 문란했고 농민들은 불안했다. 어수선한 시국을 피해 자청하여 지방에서 10여년 간 근무했다. 경주의 아귀다툼과 권모술수가 싫었다. 자천타천 대산군(전북 태인), 천령군(경남 함양), 부성군(충남 서산)의 태수로 일하면서 지방 물정을 익혔다.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품고 조정에 시무 10조를 올렸는데 그마저 먹히지 않았다. 암울한 세상, 관직은 내가 있을 곳이 못되었다. 나이 사십, 나는 삶의 근본을 생각했고 전부를 던지기로 했다. 소요자방(逍遙自放)과 유랑, 은거…. 내가 선택한 행로다. 다시 생각해도 후회는 없다.


#3. 발닿은 곳은 모두 문화명소
최치원(이하 고운)의 삶은 전반-후반부로 나누어진다. 당나라 유학시절을 포함한 전반부는 문헌자료가 남아 복원·정리가 가능하나, 후반부는 오리무중이다. 그의 마지막 행적은 합천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 계곡에서 포착된다. 고운이 이곳에서 노년을 지내다 갓과 신발만 남겨둔채 홀연히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비현실적 전설일 뿐이다. 고운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비춰보면 908년(효공왕 12) 말까지 생존하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최소한 51세 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말이니, 유랑 세월도 최소 10년은 넘는 셈이다.
고운의 유랑 루트는 경상도는 말할 것도 없고, 충청도 강원도까지 전국으로 넓게 걸쳐 있다. 그의 발길과 마음이 닿은 곳에는 어김없이 전설이 생겨났고 시문이나 문장, 비문 등이 자취로 남아 있다. 세상이 싫어 유랑했으되, 단순히 놀러 다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가 잠시라도 거쳐간 곳은 강력한 자장의 문기(文氣)가 뻗혀 저마다 문화명소가 되어 있다. 후세의 가슴 속에 고운이 당당 살아있음이다.


#4. 지자체들의 최치원 문화마케팅
고운을 챙기는 전국의 지자체는 10여 곳에 이른다. 부산 해운대구와 경남 양산시, 창원시(마산), 함양, 산청, 합천, 사천, 경북 의성 등에서 최치원을 챙긴다. 양산 물금의 낙동강 임경대(臨景臺)는 고운이 주유하다 시문을 남긴 곳이고, 합천 가야면의 농산정(籠山亭, 경남 문화재자료 제172호)은 고운이 은둔하여 수도한 곳이라 전해진다. 사천 남일대는 고운이 그곳 경치에 반해 남녘에서 가장 빼어난 절경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 월영대(月影臺)는 고운이 만년에 가족과 함께 머물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시문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후 월영대는 고려시대 정지상, 김극기, 안축, 조선시대 퇴계 이황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고운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찾아왔고, 한동안 선비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마산 해운동(海雲洞)과 월영대 인근의 돝섬, 무학산, 강선대, 청룡대, 서원곡도 고운의 자취가 배인 곳이라고 한다. 하동 쌍계사에서도 고운의 높고 가파른 문명(文名)을 만난다.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다.
고운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지 3년 만인 31세(887년) 때 문장을 짓고 직접 쓴 유일한 비문이다. 여기서 고운은 유·불·선 3교의 회통과 통합을 제기,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풍류도)과 전통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이다.


#5. 유랑 루트의 거점, 해운대
고운 유랑루트는 좁게는 경주-부산-양산-마산 등 동남권으로 잡을 수 있고, 넓게는 지리산-가야산권, 충청 남부까지 확대할 수 있다. 이들 지역을 주제별·장소별로 엮으면 의미있는 답사코스가 그려진다. 이른바 최치원 유랑길의 탄생이다.
경주가 고운의 정치적 고향이라면, 부산 해운대는 고운의 유랑 거점이 될 수 있다. 해운대 동백섬에 최치원 동상과 기념비문, 해운정(海雲亭), 석각이 있다. 동백섬 누리마루 옆의 海雲臺(해운대) 석각은 해운대 지명 유래가 된 강력한 문화 자취다.
경주 최씨 부산종친회에 따르면, 이곳의 고운 유적비는 1965년에, 동상은 1971년, 해운정은 1984년에 각각 세워졌다고 한다. 부지가 국방부 소유라 문제였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건의를 받고 풀어주면서 금일봉까지 내자, 내로라는 정치인·관료들이 줄줄이 후원금을 냈고, 그 이름들이 동상 뒤의 비석에 적혔다는 것. 경주최씨 부산종친회는 동백섬 해운정에 사무실을 두고 유적관리를 맡고 있다.
부산 해운대구는 지난 2007년부터 지역뿌리찾기의 일환으로 최치원 프로젝트를 전개했고, 최치원이 활동했던 중국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시와 교류협력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제1회 최치원 문화축전을 열어 해운의 문화적 뿌리를 더듬고 새로운 비전을 세웠다. 당시 행사장인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내외국인 200여 명이 참여해 한글 붓글씨 쓰기를 겨루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세계도시를 지향하는 해운대가 세계인 최치원을 앞세워 문화마케팅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고무적인 일이다. 필요하면 최치원 연구소를 세우고, 최치원 콘텐츠 전문기관도 만들어야 한다.
해운대가 최치원 유랑 루트의 거점이 될 경우, 중국과 전국에 널린 최치원 콘텐츠는 자연스럽게 해운대로 수렴될 것이다. 말하자면 최치원 원심력의 활용이다. 해운대에 들어온 최치원만 볼 게 아니라, 해운대를 거쳐 나간 최치원을 보고 콘텐츠를 찾아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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