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구는 해운대를 이야기가 흐르는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와 함께 지역 내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국제신문에 게재된 글로, 6회에 걸쳐 해운대 고운 이야기를 연재한다.
<3> 팩션- 청사포 사랑
청사포 푸른 바다를 마주하고 소줏잔을 주고 받았다 전설 속의 푸른 뱀을 만날지도 몰라 여기로 왔어요 취기가 돌자 그녀는 가슴 속 슬픔을 쉼없이 게워냈다 푸른색이 뱀처럼 길게 들어간 바다그림 한 점과 내 가슴에 여운만 남겨두고 다음날 그녀는 사라졌다
#1 난 푸른 바다가 싫어요. 청사포 바다가 훤히 보이는 카페 창가에 앉아 그녀가 던진 모순된 말에 난 당황했다. 그런데 왜 바다가 있는 이곳을 찾았어요? 난 그녀가 시킨 에스프레소 눈알 잔을 초콜릿과 함께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난 커피를 아메리카노로 시키지 않은 사람은 일단 취향이 섬세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분류했다. 더욱이 그녀는 에스프레소보다 두 배나 맛이 강한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를 주문했다. 추억이 있는 곳이어서 그래요. 아. 그렇군요. 그녀는 이틀 째 이층 게스트룸에 묵고 있었다. 블루 스네이크라는 나의 청사포 카페는 작지만 핀란드 목재로 만들어져 있고, 알프스풍 지붕이 아래 이층에는 두 개의 게스트룸과 야외 발코니가 있다. 그녀는 발코니에 화구를 꺼내놓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화가인가 보죠? 나는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전시회는 몇 번 열었죠. 언제 그림 보러 가도 돼요? 글쎄요. 그녀는 애매하게 답하고 눈알 잔을 단숨에 뒤집더니 이층으로 올라갔다. 사실 난 이 여인이 나의 카페 문을 열고 처음 들어오는 순간, 첫눈에 감전이나 된 듯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동안 카페를 하면서 난 많은 여인들을 보았으나 스침 이외의 별다른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대학시절 첫 사랑과 이별한 이후, 여자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 그런데 유독 이 여자에게서만 어떤 강한 기운을 느꼈다. 아름다운 이마. 금세 이슬이라도 맺힐 듯한 오똑한 코끝, 도톰하면서도 일매진 입술, 무엇보다도 첫 사랑을 닮은 깊고 해맑은 눈동자에서 강렬한 전류가 흘러나왔다. 왠지 이 여인과 운명적 만남이 될 것 같았다.
#2 다음날 난 한가한 아점 때쯤 아메리카노와 바게트 슬라이스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바다는 시원하게 열려 있었고, 그녀는 베란다에서 이젤과 팔레트를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난 커피와 빵을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좀 드시면서 그림을 그리세요. 통 식사를 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러면서 난 그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슬쩍 보았다. 바다는 쥐 죽은 듯이 평온한데 광풍이 몰아치는 미친 듯이 날뛰는 바다를 그리고 있었다. 색깔은 주황, 빨강, 노랑, 검정이 뒤섞여 춤추고 있고, 그나마 무거운 회색 하늘이 바다의 격정을 누르고 있었고, 그녀의 천재적 붓 끝에 의해 색깔은 잘 조화되어 있었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군요. 그녀는 붓을 놓고 탁자에 앉았다. 평온한 마음은 아니신 것 같군요. ...... 청사포의 하늘과 바다는 경계선 없이 한 장으로 파란데 그림에는 파란색이 한 점도 보이지 않는군요. 어제 그녀가 한 말 푸른 바다가 싫어요라는 말이 다시 귀에 쟁쟁 울려왔다. 그나마 하늘과 바다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추상화여서 다행이라 싶었다. 푸른색은 우울하고 차가운 죽음의 색인 걸 몰라요? 난 푸른 물감만 가까이만 가도 섬뜩한 한기를 느껴요. 글쎄요. 파란색은 생명의 색깔도 되지 않는가요. 지구의 생명체는 푸른 바다에서 처음 태어났죠. 언젠가 미술평론가에 들은 말도 생각이 납니다. 파란 하늘빛이 닿을 때 비로소 모든 사물들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래서 파란색은 생명의 빛이라 하더군요. 난 그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네요. 파란색이 생명의 색깔이라는 건 이곳 청사포의 이름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청사포 그러면 푸른 모래를 생각하는데 원래는 푸른 뱀이지요. 나는 청사포 푸른 뱀의 전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3 예전에 이 마을에 금실 좋은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다. 아내는 아리따운 얼굴에 예의가 바른 얌전한 색시였고, 남편은 훤칠한 키에 마음씨 좋은 호남형의 사람이었다. 어느 날 아내는 악몽을 꾸었다. 배를 타고 가는데 꿈에 누가 바가지를 달라고 해서 바가지를 주었는데 그 바가지로 배의 물을 퍼내더니 결국 배밑창에서 물이 자꾸만 들어와 배는 가라앉아 버렸다는 것이다. 꿈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 그건 허재비(귀신)가 바가지를 달라는 거야. 그때는 구멍 난 바가지를 줘야 허재비가 물을 못 퍼내고 배 밑창에서 물이 더 이상 솟아오르지 않는 거야. 남편은 걱정하는 아내를 다독이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바위 위에 서서 남편의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더 먼 수평선을 쳐다보기 위에 소나무 위에 올라가 바다를 보며 기다리기도 했다. 여인의 정성이 심연의 용궁에 고스란히 가 닿았던지 마침내 동해 용왕이 푸른 뱀을 여인에게 보내게 되었다. 여인은 푸른 뱀의 인도를 받아 용궁에 도착하였고 너무나 그리워하던 남편과 상봉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마을 이름을 푸른 뱀의 포구, 즉 청사포(靑蛇浦)라고 하게 되었고, 아내가 기다리던 바위를 망부석, 아내가 올라가서 기다리던 소나무를 망부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저기 키 큰 소나무가 망부송이고 저기 선 바위가 망부석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은 마을 이름에 뱀이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다 하여 뱀 사자 대신 모래 사자, 청사포(靑沙浦)로 쓰고 있죠. 나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커피를 마시더니 뚜벅 말했다. 지금도 이 마을에 그런 푸른 뱀이 있을까요?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글쎄요. 잘 찾아보면 있겠지요. 그녀의 그림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색감 위주의 추상 난화(亂畵)였다. 하지만 분명히 그림 속에 녹색 망부송과 회색 망부석이 그려져 있었다.
#4 사흘 째 아침 그녀는 나와 같이 청사포에서 동백섬까지 걷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서 단단히 신발 끈을 졸라매었다. 난 그녀 앞에서 관광 해설사처럼 부쩍 말이 많아졌다. 그녀에게 마을과 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곳은 부산에서 고성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동해안 해파랑길의 시작이죠. 정확하게 말하면 저기 보이는 오륙도 옆 이기대가 출발점이죠. 그런데 이곳 청사포에서 해운대까지 길을 문탠로드라고 합니다. 선탠이 아니라 문탠, 밤의 달빛이 살갗을 태울 만큼 강렬하다는 뜻이죠. 저기 달맞이고개에 서 있는 정자 해월정은 대한팔경의 하나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달을 볼 수 있는 곳이죠. 나는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의 소년처럼 혹은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목동처럼 들뜬 마음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나의 이야기에 그녀는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며 듣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 정말이에요?라고 맞장구를 치며 즐거워했다. 한번은 내가 열을 내어 설명하다 툭 치는 손이 우연히 그녀의 가슴을 가볍게 스쳤다. 급히 사과했지만 화들짝 놀라 금세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의 모습이 마치 소녀 같았다. 해운대는 해운 최치원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겁니다. 난 최치원 선생이 커피를 즐겨 마셨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당시 신라에 가배라는 커피가 아라비아와 당나라를 통해 들어와 유행했는데 당나라에 유학 갔다 온 최치원 선생도 즐겨 드셨을 겁니다. 아마 해운대 커피점이 많은 여기쯤 앉아 자신이 이름을 붙인 바다를 보며 가배를 마시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태양의 복사열이 따뜻하게 올라오는 백사장을 걸으며 난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동백섬 누리마루에 가보셨나요? 그곳에서 세계정상들이 모였을 때 가장 신경 써서 경호한 곳이 저기 바다죠. 당시 바다 밑에 한미 연합 경호대가 잠수복을 입고 새카맣게 깔려 전복을 모조리 훑어간 뒤로 지금도 해녀들이 딸 전복이 없어졌답니다. 농담이고요, 저기 오륙도가 보이나요? 저기 저 섬이 오륙도군요. 오륙도에 관한 전설 아세요? 원래 숫자들은 천상에서 질서정연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싱글로 살고 있었어요. 그것이 신이 내린 율법이었지요. 그런데 5와 6이 율법을 어기고 둘이 서로 사랑을 해 함께 딱 붙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지상에서는 난리가 난 거예요. 5와 6이 들어간 계산은 전부 안 맞는 겁니다. 이것을 안 하느님이 대노해 5와 6을 지상으로 내던져버리고 새롭게 숫자를 만들어 넣었죠. 그때 천상에서 던져진 옛날의 5와 6이 저기 용호동 앞바다의 오륙도가 된 거랍니다. 오륙도는 지상의 추운 바닷가에서도 저렇게 부둥켜안고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천상을 그리워해 한 번씩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해요. 간혹 계산이 맞지 않으면 그 시간에 오륙도가 사랑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럼, 내가 계산에 서툰 것이 오륙도의 사랑 탓이었나 보네요. 그녀는 오륙도의 이야기가 재밌다며 깔깔거렸다. 우리는 그날 저녁 청사포로 돌아와 해물구이집에서 소주에 장어와 조개구이를 안주로 먹었다. 우리 둘은 서로 잔을 주고받으며 소주를 몇 병이나 비웠다. 그녀는 과하게 마셨으며 덩달아 나도 많이 마셨던 것 같았다. 제 방까지 데려다 주실래요? 난 비틀거리는 그녀를 이층 게스트룸까지 올려다 주었다. 난 말이에요. 살고 싶어요.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쓰러져오며 하소연했다. 그녀는 신혼여행을 한국 해운대와 일본의 동해안을 다니기로 했다. 해운대의 여행길은 아주 행복했다. 그런데 일본 미야기현 게센누마를 지나는데 갑자기 집채 만한 파도가 밀려왔다. 동일본대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였다. 헤엄을 전혀 치지 못하는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해일에 빨려 들어갔다. 그런데 그 거센 해일을 뚫고 신랑은 그녀를 구한 뒤 순식간에 해일에 휩쓸려 먼 바다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결혼한 지 나흘째였어요. 차라리 신랑이 날 구하지 않고 죽었더라면...... 그 때문에 당신은 자유롭지 못했군요. 한동안 남편의 얼굴만을 그렸어요. 그러다 약을 먹지 않으면 안될 만큼 지독한 우울증에 걸렸어요. 그림조차 이렇게 바뀌더군요. 이젠 그 그늘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잖아요? 오늘이 제 남편 기일이에요.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여기 한번 오자는 심정으로 왔어요. 오늘 우리 둘이 거닐었던 곳도 남편과 함께 걸었던 곳이죠. 전 그때 이곳에서 푸른 뱀의 전설을 들어 알고 있었어요. 행여 푸른 뱀을 만나 살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한 가닥 미련도 안고 왔지요. 난 그녀의 옷을 벗기며 말했다. 죽기는 왜 죽어요? 이제 푸른 뱀을 만난 거예요. 난 나의 카페이름이 굳이 블루 스네이크(blue snake,푸른 뱀)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나의 첫 사랑이 몸을 던진 이 청사포에서 지금까지 맴돌고 있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 품안에서 작은 새처럼 파닥이고 있는 그녀를 안고 또 안을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녀가 다시 청사포로 돌아오리라고 믿는다. 지금 나의 카페 벽엔 거친 바다를 배경으로 푸른색이 뱀처럼 길게 들어간 잘 그린 추상화 한 점이 걸려있다. ■ 글 = 김하기·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