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이야기 - 최치원과 동백섬

null 게시물 상세 정보
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3.08.20

천재의 삶은 꼭 비극적으로 끝나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불우했기 때문에 천재라고 불리는가. 해운대, 그 가운데서도 동백섬을 찾으면 반드시 떠오르는 인물, 신라말의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선생은 12세 때 10년 내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부친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남이 백배 노력하면 나는 천배 노력한다(人百之己千之)는 각오로 공부한 결과 6년만인 18세 때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 길에 올랐다. 25세 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격황소서를 지었다.
반란군 우두머리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 놀라 의자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선생은 일약 당나라의 스타가 되었다.  당나라 황제가 하사품을 내리면서 뛰어난 문장과 굳건한 기상을 칭송하였지만, 선생의 향수를 달랠 수는 없었으리라.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는 시에서 선생은 가을 바람에 오직 괴로워 읊나니/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적구나/창 밖엔 삼경의 비가 내리는데/등불 앞엔 고국 생각뿐이라고 읊었다.
 결국 29세에 귀국, 신라 헌강왕에게 문집 계원필경을 올렸다. 38세 땐 진성여왕에게 나라를 바로잡을 시무 10조를 건의하고 아찬 벼슬을 얻었으나, 그의 개혁정책은 끝내 시행되지 않았고 신라의 국운은 기울어져 갔다. 선생은 43세 때 벼슬을 내던지고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택했다.
서기 898년 어느 날 해운대를 찾은 선생은 동백섬 동남쪽의 한 자연석에 그의 자 해운을 본 따 해운대라는 석각을 남겼다. 그런 뒤론 양산, 진해, 마산, 산청 등을 거쳐 합천 가야산으로 입산하였다. 청산맹약시(靑山盟約詩)에 한 번 청산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一入靑山更不還)라고 다짐을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로 부터 신선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 것도 지나치지 않으리.
중국 고대 주(周)나라의 개국 공신인 주공(周公)은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집에 선비가 찾아오면 목욕 도중이라도 머리를 묶어 뛰어나오고 밥을 먹다가도 토하고 손님을 맞이했다. 삼목삼착(三沐三捉) 삼반삼토(三飯三吐)가 여기서 비롯됐다.
만 리 밖 당나라에서도 최치원 선생을 알아줬건만 고국 신라에선 기득권 세력들이 외면했으니, 선생은 외로운 구름(孤雲)이 될 수밖에.
해운대 바다를 찾는 관광객들 가운데 선생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되며, 동백섬에서 조깅하는 시민들 가운데 선생의 높은 기상을 흠모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동백섬 정상에 추모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고, 봄과 가을마다 제사와 다례(茶禮)를 올린다고는 하나 여전히 아쉽다.
선생이 4년 여 머물렀던 중국 양저우(楊州)시에서 선생의 대규모 기념관을 세우고 대대적인 추모 행사를 한다는 소식에 더욱 안타까운 심정이다. 장보고 기념사업과 마찬가지로 한국 관광객을 겨냥한 상업적 목적이 다분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선조를 중국인의 영웅으로 빼앗겨버린 느낌이다.
양저우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해운대구가 더욱 분발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선생의 동상이 내려다보는 동백섬 한 자락에 APEC 누리마루 하우스가 자리잡고 있다.
2005년 21개국 정상들이 함께 자리했던 곳이다. 오륙도와 광안대교가 내다보이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잘 살린 이 건물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명소가 되었다.
천하의 명문장으로 중국 대륙의 반란을 일거에 잠재웠던 선생의 유적 가까이에 세계 정상들의 회의장이 세워진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누리마루를 찾은 중국인들이 선생의 유적도 함께 참배할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할 때이다.
 ■ 언론인


박병곤의 해운대 이야기 - 최치원과 동백섬

첨부파일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1유형:출처표시 박병곤의 해운대 이야기 - 최치원과 동백섬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