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달맞이고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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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09.12.29

해질 녘엔 자주, 아침나절엔 가끔씩 나는 달맞이고개를 오르내린다. 어쩌다 실비라도 내리면 옳구나 싶어 우산을 받치고 걷기도 한다. 길목마다 느적대면 2시간이 걸리는 걷기는 고요함과 경쾌함을 함께 느끼는, 달맞이고개 턱 아래 사는 동안 버리지 못할 나의 재미다.
산책보다 살짝 강도가 높은 걷기는 재개발이 확정된 텅 빈 주공아파트 후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몇몇 가구만 남았을 뿐인 아파트 단지는 그래도 화단마다 꽃들이 피고 진다.
걷기가 시작되는 아파트 후문 쪽 길은 약간 비탈지다. 단지로 들어서면 간판이나 진열대가 제멋대로 나뒹구는 상가가 을씨년스럽다. 때맞추어 버려진 폐기물 사이를 지나가던 들고양이가 꼬리를 치켜세우고 빤히 쳐다본다.
더러 철조망으로 현관문을 옭아맨 동도 있고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들의 집에는 베란다에 빨래가 널려 있다. 남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지 마을버스 정류소에 사람들이 제법이다. 그 뒤로 미림이용원의 네온이 땅바닥으로 거꾸로 처박혀 있다. 한때 집집의 가장들은 저 이발소에서 말쑥하게 머리손질을 하고 활기차게 직장으로 출근했을 것이다. 밀려나간 이발사는 목 좋은 장소를 찾았을까. 괜한 생각도 한다.
나는 빠르게 또는 느리게 걸으면서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돈다. 번잡하고 화려한 신시가지에 비해 처량하기 한량없지만 나는 이 길을 좋아한다. 사라지는 것들이 주는 아련함 내지는 혼자 걷기의 홀가분함과 고요함을 즐기기 때문이다.
나는 고급 빌라가 늘어선 아랫마을 쪽이 아닌, 잡초에 파묻힌 계단을 오른다. 키를 넘는 풀숲을 지나 나타나는 언덕배기 마을은 조용하다. 양지쪽의 백목련 두 그루는 하룻밤이면 만개할 기미를 보이고 낮은 담벼락의 개나리는 등불마냥 환하게 피었다.
다 낡은 거리일망정 봄기운이 가득하다. 어둠살이 가득한데도 사내아이 몇이 땅에 금을 그어놓고 무슨 놀이를 한다. 그 모습이 담장의 개나리와 어우러져 골목이 환하다. 아이들 앞을 지나면 달맞이고개로 내려가는 몇 개의 긴 계단이 있다.
나는 후다닥 계단을 뛰어내려서 셜록홈즈의 집에 다다른다. 일 년에 두세 차례 문학행사나 강의가 있을 때 드나들 뿐인 추리문학관이다. 1층 문학관에 서너 명의 사람이 보인다. 지나칠 때마다 사람들이 영 없지 않아 마음이 놓인다. 문학관 앞 마을버스 정류소에서 나는 잠깐 망설인다. 왼편 내리막길이 해월정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저녁 산책객들을 피해 달맞이성당 쪽으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주말엔 가족들과 함께 한번 가봐야지 마음먹었던, 바다를 전망으로 고급스럽게 앉은 카페를 지난다. 가게 앞은 옮겨 심은 야생화가 많다. 피고 지는 온갖 꽃을 구경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기도 하다.
큰 화랑이 있는 해월정 아랫길에 비해 문화 1길엔 작은 화랑들이 몇 개 있다. 걷기에 속도를 보탤까 하는데 빌라 옆으로 매달린 너덜한 현수막이 보인다. 문화의 거리에 치매병원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노인 요양 병원이 문화의 거리를 볼썽사납게 만든다고 여기진 않는다. 건강하든 병들었든 노인을 외곽으로 내모는 것이 비문화적이라고 생각하며 병원을 들여다보았다. 한 가족이 막 도착하여 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나는 자식이 찾아온 노인의 즐거움을 떠올리며 동백아트센터 길로 내려간다. 순간, 내 걸음이 빨라진다. 저만치에 벚꽃이 벙글거리고 있다.
이른 봄, 3월의 달맞이고개는 심심치 않아서 걷기엔 딱이다.

봄날 달맞이고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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