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4개국 9천여 명 선수가 묵었던 곳 선수들은 자신의 손도장이 있다는 사실 알까
고기등(古器嶝) 마을,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던 자연 마을의 이름이다. 고기등의 유래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옛 그릇 즉 옹기를 만드는 고개 마을이라는 의미로 전해진다. 또 다른 이름은 인절미 들판. 지금의 인지초등학교, 인지중학교, 반여고등학교 자리에 신라시대의 절 인지암(仁智庵) 터가 남아있어 그 앞의 들판을 인절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절미 들판의 논과 밭, 임야 9만 9,000㎡가 미군에 징발 수용돼 포로수용소가 세워졌고, 거제도로 이전한 이후에는 육군기술병기학교가 들어섰다. 병기학교가 옮겨간 이후 1999년부터 아파트가 세워져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선수촌으로 사용되었다. 44개국 9,307명의 선수가 묵었던 곳이다. 역사의 유구함을 보여주는 지역이 아닐 수 없다. 상전벽해(桑田碧海)! 논과 밭이었던 인절미 들판은 이제 선수촌 아파트 이외에도 여러 건설사의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그러니 반여1동의 인구만 4만 명에 가깝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려 하늘이 희뿌옇게 변한 주말, 반여1동 일대를 찾았다. 원동교 주변은 이미 소문난 교통요충지. 충렬로와 번영로를 통해 수많은 차량들이 오고간다. 횡단보도를 건너니 왕자맨션. 분홍빛 땅패랭이 꽃무리가 수줍게 웃고 빨간 넝쿨장미가 자태를 뽐낸다. 맞은 편 옛 콜라 공장 자리엔 골프연습장이 들어섰다. 칠순을 넘겼을까, 길에서 만난 아주머니께 옛 대우실업 자리를 물어보았다. 한화 꿈에그린 아파트 자리라고 한다. 1967년 부산에서 시작한 대우실업은 대우그룹의 모태 기업이다. 반여동에는 부산 5공장이 소재하였으며 3,000여 직원이 종사하였다. 1975년 야외복 제조시설을 지어 봉제기만 2,000대 가까이 갖추었다. 제조와 수출, 건설에 주력하면서 재계 3∼4위까지 부상했던 대우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몰락하고 말았다. 아파트 단지 옆 제법 규모가 큰 공원의 어린이 놀이터가 옛 대우실업의 정문이었다고 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던 그룹 회장은 한때 청년 실업가들의 로망이었지.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했던 선인들의 말씀이 떠오른다. 이번엔 선수촌 아파트. 해운대 토박이라고 자부해왔지만 반여동 지리엔 어둡다. 길을 물어 물어 찾아가니 아파트 서문. 20개 동에 2,290세대라고 한다. 지금이야 이보다 규모가 더 큰 대단지 아파트가 더러 있지만 분양 당시엔 화제가 되었으리라. 무엇보다도 동간 거리가 넓고 곳곳에 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이공원이라 이름붙인 게 두 곳, 바다공원, 어유공원, 산성공원, 아시아공원 등. 일명 하나 되는 광장, 즉 중앙광장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선수촌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 부산의 바다를 상징하듯 푸른색과 흰색의 사각형 열주(列柱)가 10여 개 줄지어 세워져 있고, 그 아래 보도엔 당시 메달리스트들의 핸드프린팅과 종목, 국가, 이름을 동판에 새겨놓았다. 열주를 지나니 10여 개 벽면에 핸드프린팅이 다시 이어졌다. 그 때 입상했던 선수들은 자신의 손도장이 이역만리 대한민국의 부산에서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 때 북한 선수들도 출전해 미녀 응원단이 방문했는데, 북한 선수의 핸드프린팅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원승덕 작가의 갈매기의 신화(myth of seagull)라는 조각 작품이 눈에 띈다. 왼손 중지에 내려앉은 갈매기 형상이다. 부산 사람은 모두 부산 갈매기가 아닌가. 손은 무슨 의미일까. 아시아인들의 평화와 조화를 상징한다는 작품 해설을 보고 어림짐작할 뿐이다. 리처드 버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이 생각난다. 생존을 위해 모이를 찾아 비행하는 다른 갈매기와 달리, 주인공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자유와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비행했었지. 광장 한 가운데는 어린이들로 북적거린다. 가까이 가보니 영진아동가족지원센터가 주최하는 나눔이 있는 주말 가족 체험장 행사가 진행 중이다. 10여 개 부스에서 팽이 만들기, 가방 만들기, 신문지 놀이, 요술팔찌 만들기 등 각양각색 체험이다. 어린이들이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행사장 뒤쪽에는 국기광장인지, 원형 잔디밭 둘레로 아시안게임 참가국의 국기가 게양돼있다. 그리곤 아파트 단지 바깥 도로변에 프레스센터 상가 간판이 보인다. 대회 당시 각국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던 건물인가 보다. 고개를 장산 방향으로 돌리니 앞서 말한 인지암 터에 들어선 인지초등학교가 보인다. 해운대 주민들은 어느 방향에 거주하더라도 장산을 볼 수 있는, 장산의 정기를 받은 장산 민족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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