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이야기 - 뮤지컬로 부활한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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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7.05.11


해운대문화회관 해운대연가 - 구름 위를 걷는자
진짜 부산표 창작 뮤지컬 전회 매진 기염


해운대를 사랑했던 최치원,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선생이 해운대문화회관에서 뮤지컬을 통해 부활했다. 해운대문화회관이 전국 기초자치단체 최초로 기획·제작한 창작 오페라 해운대-불멸의 사랑에 이어 두 번째로 제작한 창작 뮤지컬 해운대 연가-구름 위를 걷는 자가 화제를 모았다. 2016년 11월 30일부터 12월 3일까지 전회 매진된 데 이어, 해운대문화회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2017년 3월 23일부터 4월 1일까지 해운홀에서 8회 앙코르 공연되었다.
총제작 감독 김성모, 연출 감독 박정우, 음악 감독 천정훈, 작곡 이진실, 안무 감독 정호준 등 부산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만든 진짜 부산표 뮤지컬이다. 최치원 역 한규정, 위홍 역 김효영·왕시명, 진성여왕 역 김경원·허은미, 부호부인 역 이내영·최소영, 예겸 역 선승일·박준성 등이 열연했다. 배우, 합창단, 오케스트라 등 공연에 참여한 인원만 70여 명.
868년 12세 어린 나이로 최치원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 견일은 10년 동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며 남이 백번하면 너는 천 번을 거듭(人百之己千之)하여 노력하라고 당부하였다. 6년 만인 874년 빈공과에 합격하여 당나라의 선주 표수현위가 되었고, 회남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 직을 맡았다.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881년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드날렸다. 이 격문을 읽던 황소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저 땅 밑에 있는 귀신들 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기로 의논했을 것이니 네가 비록 목숨이 붙어있다고 하더라도 넋은 이미 빠졌을 것이다라는 구절에 혼비백산하여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최치원이 885년 17년 만에 신라로 돌아오는 대목이 뮤지컬의 첫 장면이다. 사촌동생 최윤과 최언위가 반갑게 맞아주는데, 길거리엔 굶주린 백성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진성여왕은 숙부인 위홍과 정을 통하면서 정치를 그에게 몽땅 맡겼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호족들은 난을 일으키며 외적은 호시탐탐 신라를 넘보는데 왕은 무능력했던 것이다. 위홍은 진골이 아니라 육두품인 최치원을 벼슬에 앉히고 시국 타개책을 물었다. 최치원은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건의하였다.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뮤지컬에서는 신분을 막론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발탁할 것, 무리한 조세제도를 개편할 것, 고관대신들의 녹봉을 삭감할 것 등으로 표현되었다.
최치원의 개혁정책은 기득권층인 진골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혔고,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선 위홍은 아내 부호부인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위홍을 잃은 진성여왕은 진골귀족 예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로서는 세계 최강대국에 유학하여 이름을 얻었던 글로벌 인재의 모국 사랑은 허망하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외직(外職)으로 떠돌던 최치원은 동백섬을 찾아 바위에 해운대(海雲臺)라는 석각을 남겼다. 해운대 앞바다를 바라보던 최치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뮤지컬에 나오는 같은 하늘 같은 공간에서 인간은 어찌 이리도 다른 삶을 살게끔 정해진 것인가라는 가사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최치원은 힘들고 지칠 땐 나는 언제나 구름이 되고 싶어/ 외롭고 쓸쓸할 땐 언제나 구름이 되고 싶어라며 구름 위를 걷는 자가 되면서 막이 내린다.
동백섬 정상 한시비에 새겨진 우흥(寓興)이라는 시에서 최치원은 몸은 영화 티끌에 더럽기 쉽고/마음 때는 물로도 씻기 어렵네/누구랑 담담한 맛 의논하리요/세상 사람들은 달고 취함 즐기는 것을이라며 세상을 등진 심정을 드러냈다. 결국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찾아 은거하던 최치원은 신선이 되었으리라. 유(儒)·불(佛)·선(仙) 삼교에 능통했으며 우리나라 한문학의 종조(宗祖)라고 불린 최치원은 자신의 드높은 이상을 혼탁한 통일신라말의 현실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웠으리라. 반란군에 맞서 사찰을 지키려다 숨진 승병들을 기리는 해인사 공양탑의 기문에서 최치원은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해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다고 적었다. 선생의 유적은 마산 월영대, 진해 강선대, 산청 문창대, 함양 상림 등 전국에 남아있다. 중국 양저우(楊州)에는 기념관도 건립되었다.
중원 대륙에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고국에 돌아와 병들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세상을 개혁하려던 문창후(文昌候) 최치원 선생님! 부디 되살아나 이 후손들을 굽이 살피소서!
  언론인


박병곤의 해운대 이야기 - 뮤지컬로 부활한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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