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포구 모습 간직한 도시어촌

null 게시물 상세 정보
작성자 관광문화과 작성일 2017.08.03

해운대의 자연마을 - 중동 ③청사포마을


 


옛 지명에는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스며있다. 지역의 역사와 공동체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해운대 자연마을의 지명 유래를 소개한다.



■ 청사포마을
청사포(靑沙浦)마을은 중2동 530번지 일대에 자리 잡았던 해안가 어촌마을이다. 미포로타리에서 왼편 해안으로 통하는 달맞이길을 따라 가다 언덕에 오르고, 갯바람을 타고 해송교를 지나 왼쪽으로 내려가면, 바다의 정취가 느껴지는 청사포를 만날 수 있다.
동해남부선 철길을 사이에 두고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분리되고, 아랫마을이 청사포이며, 윗마을이 새터(新基)인데 요즘은 새터마을이라 별도로 부르지 않고 청사포로 통칭해 부른다. 청사포는 일출과 월출의 황홀경을 볼 수 있는 포구와 해안선이 아름답다. 푸른 바위 틈 따개비처럼 포구의 생명은 싱싱하고 푸른 속살을 그대로 선사한다.
청사포는 1만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니암제 박편과 원판형 석기가 발견되기도 한 이곳은 맛있는 해산물 먹을거리가 많아 구석기 사람들이 등잔산 언덕위에 막집을 만들어서 살았다. 해안선을 따라 동북에서 남서로 약 700m 정도 길게 펼쳐진 청사포마을은 17세기경에 민촌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김해 김씨, 영일 정씨, 밀양 박씨, 경주 김씨가 주로 살았다.
청사포는 해운대에서 교육의 중심이 되는 학문마을이었다고 한다. 청사서당(1910~1933)이 지금의 어촌계 회관자리에 있었다. 1927년 4월에 청사서당의 현판을 걸때 청사(靑沙)라고 고친 이후 지금까지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이 서당에는 청사포마을은 물론 새터 좌동 미포 대천 오산 온천 송정 구덕포 마을 등 인근지역의 학생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한학을 배워서 수영이나 동래지역 상급학교로 진학했다.
구덕포와 경계지점인 다릿돌에서 고두백이(고두말이라고도 한다)까지의 청사포 해안선은 기암 바위해안으로 그야말로 수려한 절경이다.
기장 미역은 청사포 다릿돌 미역을 말한 것이다. 다릿돌 미역밭은 조류가 빨라 쫄깃한 미역의 생산지라 서로 차지하려고 하였다. 1930년 다릿돌 미역밭 행사권 시비로 기장과 청사포와의 법정투쟁 끝에 청사포가 승소해 청사포 몫이 되었다. 다릿돌 미역밭에서 생산된 미역 수입으로 매년 3차례의 당산제와 4년마다 개최하는 풍어제를 4백 년 동안 지내왔다. 1964년 청사포에 미역가공 공장을 지어 다릿돌 미역을 10년간 일본에 수출했다.
지방어항인 청사포항은 100여 명 어업인의 삶의 터전이자 50여 척의 어선이 안전하게 정박하고 있는 보금자리다. 어선은 4각 통발로 쥐치, 잡어, 도다리, 방어 등을 잡는다. 미역어장은 40헥타르의 넓은 양식미역밭을 20가구에서 운영 관리하고 11~4월까지 채취한다. 청사포 앞바다는 물이 맑고 조류가 급물살로 이어서 미역 양식의 최적지로 쫄깃한 단맛을 가진 미역이라 선호도가 높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횟집이 생긴 곳은 해운대다. 청사포는 1970년대부터 어자원이 풍부하며 이곳의 생선은 육질이 단단하고 씹히는 맛이 일품이라 경향각지의 사람들이 붐벼 호황을 누리는 명소가 되었다. 횟집을 비롯해 장어·조개구이가 유명하다.
청사포 당산은 중2동 594번지 마을의 남쪽 해안도로 북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건립연대는 1970년이다. 김씨 골매기 할매를 모시고 있으며, 1년에 3회 제의를 올린다. 제의 절차는 산신제→본당제(골매기+세존+성주)→거릿대 장군제→망부석제 순서로 지낸다. 김씨 골매기 할매를 모시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300여년 전 청사포가 마을이 생겼을 당시 김씨 부인은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매일 망부석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 뒤 김씨 부인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김씨 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골매기 할매로 좌정시켰다고 한다.


첨부파일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1유형:출처표시 한적한 포구 모습 간직한 도시어촌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