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나무> 해운대구청 해송
작성자 | 홍보협력과 | 작성일 | 2024.0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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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굽도록 같이 지낸 소나무는 어떤 마음일까요?" 나는 해운대에 산다. 해운대구가 잘되기를 바라고 해운대구청이 잘되기를 바란다. 해운대구청의 나무 역시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구청의 나무를 보노라면 조마조마하다. 몇 년쯤 지나서 구청이 재송동 신청사로 옮겨가면 여기 나무들은 어쩌나. 같이 가나, 그대로 두나. 아니면 아예 없애나. 해운대구청의 나무는 하나하나 장하다. 우선은 오며 가며 눈에 띄는 도로변 구골나무가 장하다. 구골나무는 이름부터 심장하다. 왜 구골일까. 검색하면 찾아지겠지만 내 나름 정의한다. 아홉 골짜기 같은 나무라고. 실제로 그렇다. 밑동에서 위로 뻗으면서 갈래갈래 갈라지는 가지는 산꼭대기에서 갈래갈래 갈라지는 골짜기 같다. 산딸나무도 장했다. 지금은 온데간데없지만 한두 해 전만 해도 오뉴월 피우는 송이송이 하얀 꽃이 장했다. 울산 태화강 산딸나무가 그렇고 고성 동동숲 산딸나무가 그렇지만 산딸나무 하얀 꽃은 참 순정하다. 동심 같다. 이 글 처음에 구청의 나무를 보노라면 조마조마하다라고 쓴 계기도 사실은 이 산딸나무다. 구청의 다른 장한 나무들이 산딸나무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면 어떡하나, 그 마음으로 이 글을 열었다. 구청의 장한 나무는 뭐니 뭐니 해도 해송이다. 해송은 바닷가 소나무. 해운대는 어쩌면 해송의 도시다. 해수욕장 송림공원도 그렇고 솔밭예술마을도 그렇고 바다를 낀 해운대는 그 옛날부터 소나무의 도시였고 해송의 도시였다. 해송의 미덕은 해풍과 갯내에 맞서서 내면이 딴딴하다는 것. 그러면서 일직선을 고집하지 않고 이 갈래 저 갈래 유연하다는 것. 한마디로 외유내강의 전형이 해송이다. 해운대구청 해송은 이 세상 모든 해송의 전형이다. 일직선을 고집하지 않아서 가장 유연하게, 가장 자유롭게 갈래갈래 뻗었다. 그러면서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구청 연못을 둘러싼 해송은 한두 그루가 아니건만 어느 해송도 다른 해송의 가지를 밀어대거나 막아대지 않는다. 경계 없이 무변광대 뻗어가면서도 상대와 부딪거나 가로막지 않는 해송은 삶의 지혜를 넌지시 보여준다. 해송 나뭇가지 하나하나 지혜의 화신이다. 해송이 사방에서 감싼 연못은 서당 3년이다. 삼백육십오일 자기를 감싼 해송을 본받아서 잔잔한 지혜가 넘친다. 연못이 얼마나 지혜로운지는 연못이 품은 물고기를 보면 안다. 물고기 역시 서당 3년. 몇십 마리는 족히 넘는 굵직한 잉어 어느 잉어도 다른 잉어를 밀어대거나 막아대지 않는다. 오로지 유유하다. 유연하다. 해운대구청 연못의 역사는 꽤 오래된다. 근처가 온천 지역이듯 여기 연못도 원래는 온천이었다. 박병곤 선생은 해운대 토박이. 해운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일보 주필을 지냈으며 해운대신문에 해운대 이야기를 연재했다. 박 선생은 해운대 이야기에서 수영장과 연회장, 동물원, 정원 등을 갖춘 온천풀장이 해운대구청 자리에 있었다고 밝혔다. "구청이 이사 가면 허리 굽도록 오랜 시간 같이 지낸 소나무는 어떤 마음일까요?" 잘 모르겠다. 같이 가는지, 그대로 남는지. 아니면 아예 없어지는지. 나무도 지혜롭고 연못도 지혜로우니 지혜롭게 잘되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점심시간. 구청 직원인지 민원인인지 연못 벤치에 앉은 이는 마음이 비단이다. 자기보다 열 배는 더 큰 해송을 걱정한다. 모르겠다. 해송이 저리 큰 게 어찌 해송만의 힘일까. 바라봐 주고 걱정해 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해송은 오늘 여기까지 왔으리라. 어쨌거나 해송을 보는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해송도 조마조마한 모양이다. 분신 같은 솔잎을 연못 수면에 툭 빠뜨린다. 동길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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