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장산 모정원서 꽃 피운 독립·애족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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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19.02.11

청산리 영웅 강근호 선생
학도의용군 이정희 여사
53년 강원도서 운명적 만남

이 여사 장산개척단 이끌며
강 지사의 애국적 삶 조명

대학 신입생 시절 합창대회에 이웃집 아저씨 양복을 빌려 입고 대학극장 무대에 올라섰다.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라 졸병(?)이었던 탓에 선배님들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한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동아리 초대 지도교수였던 먼 구름 한형석 선생님이 작곡한 압록강 행진곡을 불렀다. 선생님은 동래 출신으로 아버지 한흥교 애국지사와 함께 어릴 때 중국으로 건너가 작곡을 배웠으며, 광복군에서 독립군가를 짓고 공연 활동을 하는 등 무장 항일투쟁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10여 년 전이었던가. 해운대 장산에서 내려오던 길, 체육공원 근처 커다란 태극기가 나부끼던 집에서 무슨 행사가 열렸다. 한형석 선생님에 이어 지도교수를 맡았고 필자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셨던 박태권 교수님을 뵈었다.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신 애국지사 강근호 님의 댁이란다" 이제야 돌이켜보니 추모비 제막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는 장산을 찾을 때마다 몇 차례 들러 추념하였다.
한 선생님이 예술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하셨다면, 강근호 지사님은 무장투쟁을 하셨다. 강 지사는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만주 용정에서 만세운동을 하였고,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독립군 양성에 나섰다. 1920년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북로군정서 주력 부대인 보병 1중대장으로 참전, 일본군을 무찔렀다. 한때 러시아군 형무소에 수감됐으나 우리 임시정부의 항의로 지청천 장군과 함께 석방되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청년단 중앙훈련소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51세에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해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3년 6.25 전쟁이 발발해 호국사령부에서 소령으로 근무하던 중 군무원인 이정희 여사를 만나 진중 결혼식을 올렸다. 중령으로 전역한 후 부산 동광동에서 독립운동 동지나 후배 장교들과 만남의 장소로 기원을 운영하다 1960년 영도구 영선동 판잣집에서 63세로 세상과 하직하였다. 풍진 세상을 만나 나라를 지키려 두 차례나 전쟁에 나섰다니, 사이먼과 가펑클이 불러 밀리언셀러가 되었던 노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ge of troubled water)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정희 여사는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증손녀다. 대전에서 여고를 다니던 중 6.25 동란이 터져 증조부를 찾아 대구로 갔다. 그 해 학도의용군에 자원 입대하여 왜관 제2보충대에서 장병 모집과 선무방송요원으로 활약하다 다시 여군2기로 입대하였다. 1953년 강원도 양구 103사단 121연대에서 정보요원으로 근무하던 중 34세 연상인 연대장 강근호 지사를 만났다. 하얀 눈이 쌓인 연병장에서 군악대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아들을 가지는 바람에 전역하고, 서울에서 지내다 강 지사의 제대 후 부산 영선동으로 이주했다. 강 지사와 함께 생활한지 4년 만에 강 지사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계가 막막해진 이 여사는 어린 남매를 키우기 위해 남편의 미국 동성무공훈장을 가지고 하야리아부대 사령관을 만나 지원을 요청하였다. 미군 측으로부터 현금 지원을 받고 고아원 보육사로 취업하게 되었다. 보육원과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재건국민운동본부 동래지구 부위원장을 맡았다. 해운대 장산 중턱에 개척단이 가꿔놓은 논이 황무지로 변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를 털어 후원하였다. 장산개척단 단장을 맡은 이 여사는 농림부로부터 임야 50여만 평을 단원들이 불하받게 도와 각종 채소를 심고, 젖소 사육을 해 우유를 생산하도록 하였다. 오늘날 장산마을은 이 여사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는 동산, 즉 모정원(母情苑)은 1964년 건립되었다. 남편의 가묘를 마련해 애국지사 강근호의 묘라는 비석을 세우고 태극기를 게양하며 삼일절, 임시정부 기념일, 현충일, 광복절에 제사를 올렸다. 가묘를 대전 국립묘지로 옮겼으며, 원호처로부터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이 잇따라 추서되었고, 육군본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도 받았다. 2000년 53사단 장병들이 강 지사의 가묘가 있던 자리에 추모비를 세우면서 이 여사의 공훈을 함께 새겼다. 이 여사는 2016년 청산리대첩 승전 기념일에 아들과 딸을 남겨둔 채 꿈에도 그리던 남편의 곁으로 갔다.
한국해양대 겸임교수로 있던 김재승 박사가 자신이 수집했던 자료를 참조하고 이 여사의 구술을 들어 강 지사와 동지들의 전기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이라는 책을 2002년 발간했다. 이 여사와 김 박사의 노력으로 이름 없는 전사들이 구국 영웅으로 부활한 것이다.
아들 강귀철 선생은 해운대초등학교를 나온 해운대 토박이다. 현대자동차에 오랫동안 근무했으며 지금은 태원정공이라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모정원을 관리하고 있다. 이제는 강 지사는 물론 이 여사와 김 박사도 이 세상에 없다. 아들 강 선생은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던 그 정신을 어떻게 이어갈지 고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정원이 있어 장산이, 해운대가 더욱 빛난다. 언론인

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장산 모정원서 꽃 피운 독립·애족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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