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해운대서 일군 여성 교육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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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20.03.14

학비 없어 고민했던 소년
여자실업학교 설립

교육감 청와대수석 거쳐
부산에서 가장 우수한
외국어고등학교 운영

맹자도 인정해줄만 한
교육자가 아닌가

맹자(孟子)는 군자의 삼락(三樂) 가운데 하나를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라고 했다. 왕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세 가지 즐거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학비가 없어 중학교 진학을 고민했던 시골 소년이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여성 직업교육의 산실인 여자실업학교를 설립했고, 국립고교 교장, 부산시 교육감,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거쳐 부산에서 가장 우수했던 외국어고등학교를 운영했다면 맹자도 인정해줄만 한 교육자가 아닌가.
정순택(80) 교육감, 몇 번 만난 적 있지만 어느 직함을 써야할 지 망설이다 교육감님이라고 불렀다.
경남 하동군 고전면 곤궁한 집안에서 자라나 부산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생 6년 내내 반장을 맡았지만 졸업하자 곧장 부산중학에 진학한 것은 하동군에서 처음이었다고 한다. 법관이나 외교관을 꿈꾸었던 소년이 교육자가 된 계기는 당시 서울의 명문법대에 진학하지 못하면서부터였다.
동아대 법대 재학 중 미국 유학을 꿈꾸었으나 정재환 총장의 도움을 받으면서 독일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 성분도병원에 계시던 에르나 평신도 수녀님의 독일어 회화 지도를 받았고, 안토니오 신부님과 만나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독일의 천주교 지원 단체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1965년 독일 경제협력성 저개발국 지원처의 협력을 얻어 1965년 중학 과정, 1969년 기술 및 직업교육 위주의 고교과정인 한독여자실업학교를 설립했다. 매년 2∼3회 4∼6주씩 독일에서 직업, 특수, 사회문화, 진학지도 등을 연수받았는데 20년 동안 50∼60회 수학하여 이수증이 20개를 넘어섰다. 한독여실은 독일식 마이스터 교육이 우리나라에 처음 적용되었던 데다 학비가 무료여서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실업계 학교 봉직 28년 만에 교육부 요청으로 국립해사고 교장을 거쳐 부산시 부교육감을 맡게 되었고, 1년 후 교육위원들이 선출한 부산시 교육감이 되었다. 1995년 3월 당시 53세 전국 최연소였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초등학교 육성회비 폐지를 발표했는데 오보라고 주장했던 교육부가 유네스코 교육연보를 접한 뒤 전국적으로 시행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다. 해운대, 북부교육청 신설과 56개 학교 신설, 각종 특성화고와 장애인학교, 그리고 과학영재학교의 전신인 과학고등학교를 세워 부산교육을 다양화시켰다. 학교장 자율경영체제를 도입하여 부산에서 서울대 합격자가 443명까지 늘어났다. 전국 16개 시·도 교육청 가운데 3년 연속 최우수 평가를 받은 쾌거는 부산 교육가족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학교운영위원과 학부모 대표 5,000여 명이 선거권자로 확대된 11대 교육감 선거에서 무난히 재선되었다.
2년가량 지났을 때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 임명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교육현장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니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교육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학급당 학생 수를 줄여야 하고 교원 정원을 대폭 늘릴 수밖에 없었다. 정년 단축과 명퇴, 자연 감소 등 2만 3,000∼4,000명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1만 학급을 증설하고 교원 2만3,600명을 증원하는데 16조 원이 필요했다. 20% 이상 증액할 수 있는 지방재정교부금법과 교육세법이 개정되어 예산 확보가 가능하다고 대통령께 보고하고 계획대로 실행되었다. 중학교 무상의무교육 전국 확대실시도 추진하였다. 뚝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을 거쳐 2003년 3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한독여실에서 교명을 바꾼 문화여고가 과학기술교육을 실시했다면, 외국어교육을 위해 부산국제외국어고등학교를 2004년 설립했다. 국제외고는 머지않아 특목고에서 일반고인 부산센텀여자고등학교로 전환하게 된다. 부산문화여고 3만6,000명, 부산국제외고 졸업생 4,000명은 반세기를 훌쩍 넘긴 교육자 외길에서 얻은 보석 같은 존재이리라.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2남 2녀를 홀로 키우신 어머니는 늘 "시냇물과 같이 맑게, 신작로와 같이 곧고 바르게 자라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셨다. 초등 6학년 때 담임이었던 강기중 선생님은 부산중학에 시험을 치러갈 때 호주머니에 차비를 넣어주셨던 인자한 스승이었고, 교육감이 되어서도 계속 뵈었던 부산고 고(故) 홍금술 교장선생님은 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어주셨다.
해운대는 정 교육감이 육성해온 학교가 소재할 뿐 아니라 48년째 이사 한 번 가지 않고 우동에서 살고 있으니 고향이나 다름없다. 정철진 출장소장 시절 자문위원, 구청 승격 이후엔 구청 자문위원, 해운대경찰서 자문위원, 선거관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감 재임 중 해운대 신시가지에 14개 학교를 신설했고,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때 반여동에 선수촌을 건립했다. 정 교육감은 1972년 달맞이고개에 있던 골프장이 노포동으로 옮겨간데 대해 무척 아쉬워한다. 해변과 온천, 골프장을 두루 갖춘 세계적인 관광휴양지가 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인재 양성이든 도시개발이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얼마나 소중한가.
*언론인

박병곤의 해운대 역사와 인물 - 해운대서 일군 여성 교육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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