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 생태복원 길을 모색하다

null 게시물 상세 정보
작성자 소통협력과 작성일 2020.01.06

장산이 품고 있는 숨은 이야기

해운대의 진산, 장산은 불교설화에서 산 이름이 유래되었다. 산맥은 지금의 반송2동 운봉산(雲峰山)에서 시작되어 내려왔다. 장산은 필자의 어린 시절 상살미산 또는 상산(上山)이라 불렸다.
상산은 제일 높은 산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그러니 신령스런 영산이며 전국의 10대 명산에 속한다고 한다. 옛날 부족국가시대 이 산을 중심으로 장산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고장 해운대가 유서 깊은 고장임을 입증한다.

* 1740년 동래부지 기록
산의 정상에 평탄한 곳이 있고 그 가운데가 저습한데 사면이 토성과 같은 형상이며, 둘레가 2천여 보(步)가 된다. 속(俗)에 말하기를 장산국의 터라 한다. 한편 장산은 풍수로 대장군 기세가 서려 있다 하여 장군산(將軍山)으로 부른다. 현재 공군과 육군, 경찰특공대 등 군부대가 주둔하여 있다.
또한, 장산은 산의 지맥이 아홉 갈래로 뻗어 있어 구룡산(九龍山), 물산(水山)으로 불리어진다. 이 말은 장산의 물은 수질이 좋다고 소문이 나 있으며 산 정상부터 산 아래까지 물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즉 찬물(약수) 너덜겅에서 솟는 물, 더운 물이 해운대 온천이다. 보배로운 장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동남해안의 이백리 바다, 다대포 앞바다에서 서생이 한 눈에 보이며 옛 우리 땅 대마도를 가장 가깝게 볼 수 있고 바다에서 떠오르는 대한팔경의 해운대 저녁달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다.

* 장산국 건국신화
아득한 옛날, 고씨들이 장산 기슭 장자벌에서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이 마을에는 고선옥(高仙玉)이라는 처녀가 홀어머니와 함께 토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소나기가 그치자 먼 하늘에서 선인이 영롱한 무지개를 타고 마을로 내려와 이끌리듯 고선옥의 토막집을 찾았다. 선인은 선녀보다 아름답고 옥처럼 빛나는 고선옥의 모습에 매혹되었다. 이들은 혼인을 하였고 아들 열 명과 딸 열 명을 낳았다. 이들은 저마다 안 씨, 정 씨, 박 씨, 이 씨, 김 씨, 최 씨로 창성하여 그 마을을 다스렸다. 선인은 마을에 토성을 쌓아 그 씨족들을 다스리는 대족장이 되었지만 회혼 때가 되자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등천하였다. 그때부터 고선옥은 고씨족을 다스리는 고씨 할매가 되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고씨 할매를 고을의 질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며, 매년 정월 보름날에 고당 할머니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 다른 풍습으로, 마을 사람들은 들에서 식사를 할 때 반드시 첫 숟가락에 밥을 떠서 고씨례라고 고씨 할매에게 예를 올렸다. 그래야만 식후에 탈이 없다는 것이다.

* 장산 오능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발견되어 일찍이 장산국이라는 부족국가가 성장한 풍요로운 땅이었다. 장산국은 신라와 가야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였는데, 이 장산국에 5개의 왕릉이 존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와 가야의 침략을 피하기 위하여 궁궐과 왕릉은 장산 안에 있었으며, 6·25전쟁 당시 미군이 탄약 창고를 설치하기 전 좌동 일대 어느 작은 절(약수암) 옆에 5개의 큰 무덤이 바로 그것이라 전해진다. 기원 후 5~6세기경에 신라(석탈해왕) 세력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장산국이 멸망하자, 장산국 사람들은 사포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고 장산의 오능은 초라한 무덤으로 변해 점차 잊히게 되었다. 좌동 토박이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 그 무덤을 보았는데 탄약 창고 공사를 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오능을 찾을 수만 있다면 해운대의 어느 관광 자원보다 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가진 아름다운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장산의 땅 속에 숨겨져 있을 장산국의 전설은 우리들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장산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전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장산 생태복원 길을 모색하다

첨부파일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4유형:출처표시, 상업적이용금지, 변경금지 장산 생태복원 길을 모색하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