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선 굵고 하나는 섬섬옥수 마음맞는 남녀 짝 이룬듯 살갑다
양팔 벌려 세계인 맞이하는 광장 누구라도 시원시원 서글서글해진다
하늘로 솟구쳤다 돌아오는 물줄기 앞만 보며 내달리다 아득히 멀어진 지난날 돌아보며 생각이 깊어진다
6월이다. 6월은 해운대해수욕장이 개장하는 달. 해수욕장이 열리고 해수욕장 가는 길이 열린다. 해마다 그렇지만 2018년 올해는 해운대해수욕장 개장이 더욱 각별하다. 해수욕장 가는 길이 사람 중심으로 바뀐 까닭이다. 차와 사람이 엉키던 길에서 사람을 배려하는 광장으로 확 바뀌었다. 광장 한가운데는 이름도 곱고 실제로도 고운 분수가 기다랗게 들어섰다. 해운대광장과 고운바다길분수가 그것이다. 해운대광장과 고운바다길분수. 이름이 단아하면서 산뜻하다. 그러면서 하나는 선이 굵고 하나는 섬섬옥수다. 마음이 맞는 남녀가 짝을 이룬 듯 살갑다. 새 광장, 새 분수답게 이름 역시 새롭다. 지은 지 한두 달 남짓. 둘 다 공모해서 엄선했다. 그러기에 둘 다 금쪽같고 은쪽같은 이름이며 들여다보노라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옥동자 옥동녀 이름이다. 해운대광장은 말 그대로 해운대를 대표하는 광장. 처음 들어도 평생 기억되는 이름이다. 해운대가 이미 세계적인 명소이기 때문이다. 공공장소 명칭을 정할 때 고려하는 요소인 지역성, 지속성, 보편성, 선명성, 역사성 등등을 두루 갖춰 더더욱 반짝반짝 윤이 난다. 고운바다길분수는 중의적 이름이다. 해운대 지명 유래인 신라 대문장가 최치원의 호가 고운(孤雲)이며 해운대해수욕장 가는 길이 고와서 고운이다. 해운대광장은 담대하다. 굵직한 붓으로 단숨에 휘갈긴 일필휘지 한 일 자 광장이다. 광장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훤하다. 바다와 접한 광장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군더더기가 없어야 하고 자잘하지 않아야 한다. 광장은 하루하루 깨알 같고 좁쌀 같은 일상과는 엄연히 다른 공간. 그런 광장의 전형이 육지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해운대광장이다. 해운대광장은 지하에서 천상으로 이어지는 광장이기도 하다. 도시철도 해운대역에서 해수욕장 방면 출구로 나오면 시야가 탁 트여 시선이 하늘까지 닿는다. 출구로 나오는 순간 누구라도 속이 탁 트이고 누구라도 하늘처럼 대접받는 느낌이 든다. 해수욕장 가는 길목부터 사람을 대접하고 사람을 중심에 둔 청정지대 블루 존이 해운대이고 해운대광장이다. 여기 말고도 해운대는 곳곳이 광장이다. 곳곳이 탁 트여 시원시원하고 서글서글하다. 그래서 해운대에 들면 누구라도 시원시원해지고 서글서글해진다. 해운대의 바람이 그렇고 해운대의 소리가 그렇고 해운대의 사람이 그렇다. 탁 트인 해운대에선 누구라도 광장이 된다. 누구라도 시야가 트이고 속이 트인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그래서 해운대에선 누구라도 멀리 보며 안목이 높아진다. 해운대 사는 사람이 그렇고 해운대 찾는 사람이 그렇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해운대 기차역. 동해남부선 기찻길이 다른 데로 옮겨가면서 기차 다니지 않는 기찻길이 되었고 기차 서지 않는 기차역이 되었다. 기차역 팔각정 계단에 앉아 해운대광장을 본다. 팔각정 도로 너머부터 해수욕장까지가 해운대광장이다. 스무 살 무렵에도 역 이쯤에 앉아 있었다. 오겠다는 사람은 다음 기차가 지나도록 오지 않았고 갯내음 불어오는 바다 쪽을 보며, 도로 너머 광장 저기를 보며 오래오래 앉아 있었다. 광장. 광장은 뭘까. 기다리는 이에게 광장은 지움이다. 그리고 비움이다. 내 안의 기대를 조금씩 지우고 비워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매개가 광장이다. 엉덩이 털고 일어서듯 이루지 못할 기대를 털고 일어서도록 다독이는 게 광장이며 갯바람 부는 너른 세계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중간자가 광장이다. 나를 지우고 비우는 게 왜 두렵지 않겠냐만 내 안에는 버려야 할 내가 많은 것 못지않게 내가 모르는 새로운 나도 많다. 도로 너머 광장을 본다. 스무 살 무렵과는 달리 반듯해지고 넓어진 광장을 보며 심호흡한다. 숨을 길게 들이쉬고 길게 내쉰다. 그러고 보면 들이쉬고 내쉬는 숨은 젊을 때 다르고 나이 들어서 다르지 싶다. 젊을 때는 길게 내쉬는 횟수가 많다면 나이 들어서는 길게 들이쉬는 횟수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수록 격정이 무뎌져 그런 걸까 싶기도 하다. 숨을 길게 들이쉬면 내 안으로 빨려드는 것들. 내 안에서 무뎌지는 것들. 모 아니면 도였던 성정이 무뎌지고 뱉고 나서 주워 담기 바빴던 언사가 무뎌지고 지키지 않으면 잠 이루지 못했던 언약이 무뎌진다. 모났던 내 젊은 날이 좋았던가, 무뎌져서 펑퍼짐한 지금이 좋은가. 그런 마음도 모른 채 숨을 길게 들이쉴 때마다 광장의 열기는 내 안으로 빨려든다. 해운대광장은 열기의 광장. 축제의 광장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은 사람이 열기를 내뿜고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은 사람이 열기를 들이킨다.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과 살아온 날이 많은 사람이 열기를 내뿜고 들이키며 상생하는 축제의 밤과 낮은 멀리서 봐도 보기 좋고 가까이서 봐도 보기 좋다. 나라 안 사람과 나라 바깥 사람이 경계를 허물고 한데 어울리는 풍경은 멀리서 봐도 보기 좋고 가까이서 봐도 보기 좋다. 다양성은 해운대광장이 가진 큰 미덕이다. 피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이 제 나라 광장처럼 해운대광장을 돌아다닌다. 생글생글 눈웃음 지으며 지나치는 그네들을 보노라면 여기가 한국의 해운대가 아니고 외국의 해운대 같다. 세계의 해운대 같다. 그런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든다. 실제로 해운대광장은 세계적 광장이다. 명칭을 보면 금방 안다. 세계적 광장이나 공원은 명칭이 대체로 단순명료하다. 미국 센트럴파크가 그렇고 영국 트래펄가광장이 그렇다. 단순명료한 건 그만큼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넘치면 말이 적어지고 선이 굵어진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필휘지 묵직한 한 일 자가 된다. 역동 또한 해운대광장이 가진 미덕이다. 광장 저쪽 끄트머리는 바다. 바다는 매일매일 다르고 시간시간 다른 역동의 현장 아니던가. 바다와 맞닿은 해운대광장까지 바다의 역동성이 번져서 광장은 매일매일 다르고 시간시간 다르다. 바다에서 파도가 연신 밀려오고 밀려가듯이, 파도 소리가 연신 밀려오고 밀려가듯이 해운대광장에는 연신 사람이 밀려오고 밀려가며 분수가 연신 솟구친다. 분수! 분수에서 날리는 물보라에 젖어 본 적이 있는가. 분수에서 날리는 물소리에 젖어 본 적이 있는가. 물보라에 젖고 물소리에 젖으면 누구라도 눈망울이 촉촉해지고 속마음이 촉촉해진다. 세상을 보는 눈망울이 촉촉해지고 세상을 읽는 속마음이 촉촉해진다. 다음 기차가 지나도록 오지 않았던 당신이 이해되고 들쑥날쑥 스무 살 그 무렵이 이해된다. 그래그래, 당신의 마음을 내가 안다며 고개 끄덕이고 그래그래, 스무 살 무렵은 다 그런 거야며 나에게 고개 끄덕인다. 해운대광장 고운바다길 분수는 고운 분수!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가 처음으로 돌아오는 물줄기가 곱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가 처음으로 돌아오는 물소리가 곱다. 저 물줄기 보려고, 저 물소리 들으려고 지나가다가 멈춰 서는 사람들. 멈춰 서는 시간이 대개는 몇 분 몇십 분이지만 몇 시간 몇 날에 걸쳐서 멈춰 서는 사람은 왜 없을 것이며 몇 달 몇 년, 심지어는 한평생에 걸쳐서 멈춰 서는 사람은 왜 없을 것인가. 분수는 귀하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가 처음으로 돌아오는 분수! 사람은 많아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은 많아도 처음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 갈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거나 않았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앞만 보며 내달리다 아득하게 멀어진 처음을 돌아보며 생각이 깊어지고 사람이 깊어지는 곳이 분수다. 해운대광장 고운바다길분수가 해수욕장 개장에 맞춰 6월 첫날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하면 해운대를 찾는 사람은 또 얼마나 깊어질 것인가. 드디어 6월! 해수욕장 가는 길에 들어선 해운대광장과 고운바다길분수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활짝 벌린 양팔에 해와 달과 바람과 소리가 안겼다가 나오고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과 살아온 날이 많은 사람이 안겼다가 나오고 나라 안 사람과 나라 바깥 사람이 안겼다가 나온다. 그만큼 안았으면 지칠 만도 하련만 광장도 분수도 표정이 선하다. 광장과 분수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도 표정이 선하다. 해운대에 들면 누구라도 그리된다. 누구라도 선해진다. dgs1116@hanmail.net 동길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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