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장산이야기

문화이야기

  • 홈
  • 장산이야기
  • 문화이야기
범례
  • 주요지점
  • 현재위치

모정원

  • 모정원 좌측 이미지
  • 모정원 우측 이미지
상세정보
  • 위치
    해운대구 장산로 331-216(좌동)
설명
과거 청산리 전투의 중대장이었던 강근호 독립지사의 흔적이 있는 곳 애국지사 강근호(姜槿虎 : 異名 姜華麟)지사는 함남 정평 출신으로 1916 학생소요사건으로 일경에 수배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직후 무장독립군의 산실(産室)인 신흥(新興)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6월 이장령 참모장과 함께 북로군정서에 부임하여 사관연성소 교관 및 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역(戰役)에서는 대한군정서 제1중대장으로 최전선에서 중대원을 지휘하여 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 후 1921년 5월 시베리아 흑하사변, 1922년 10월 고려혁명군 교관, 1926년부터 민족적 사회주의 독립운동 등으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만주에서 조국광복을 맞이하였다. 1947년에 귀국한 선생은 1949년 2월 52세의 나이로 陸士(8기특별4차)에 입교하여 장교(군번 13193)가 되어 建軍과 6·25를 거쳐 1956년 5월 103사단 118연대장(중령)에서 전역하였다. 1960년 2월 영도 영선동에서 63세로 作故한 선생의 유해(遺骸)는 1964년 장산으로 모셔왔다가 1990년 12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강근호 지사의 배우자인 이정희 여사는 1963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미군 부대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다가 제대군인 10여 명과 함께 ‘장산개척단’을 조직했다. 당시 원호청으로부터 정착 대부금을 받아 설립된 장산개척단은 1963년 지금의 장산마을 20만 평을 조성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산정(山頂)을 개간한 뒤 고랭지 채소를 가꾸며 생활 터전을 일구었다. 이후 부산시가 퇴역 장병들에게 토지를 불하하자 거주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개간 초창기에는 무와 배추를 재배하였으며, 한때 장산 무가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1970년대 초반 장산 무의 경쟁력이 상실되자 1972년 ‘장산 목장’(현재는 군부대로 소유권이 이전됨)을 시작으로 젖소 사육으로 사업을 전환하게 되었다. 그 후 목장이 사라지고 현재 20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이 주로 고랭지 채소인 무, 배추, 마늘 등을 재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장산마을의 시작이 바로 장산개척단이며, 지금의 모정원과 장산에 남아 있는 축사 등이 바로 개척단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다.